2012

무화과나무 잎의 옷과 가죽옷

by 삶의언어 posted Jul 31, 2024 Views 8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ESCClos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Extra Form
오늘의 주제 예수님
예배드린 날 2012-03-18
오늘의 성구 창세기 3장 11, 2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VUcbX9WSDvM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야훼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세기 3장 11,21절

 

하나님 영광의 옷 입었던 아담과 하와
범죄 후 벌거벗어 스스로 찾은 옷 쓸모없어
예수 보혈의 옷 입어 하나님 영광 회복해야


 인간의 문명은 의복의 문명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각 나라는 그 자연 환경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옷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속해 있는지 유럽에 속해 있는지 중동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1. 아담과 의복

 창세기에 태초로 아담과 하와가 입은 옷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보면 참 재미가 있습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을 때는 죄를 짓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존재했기 때문에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고 있어서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면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온 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굉장히 영광스럽게 보이고 찬란하게 보이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자마자 처음 느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자 그들은 벌거벗은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뜯어서 앞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 앞치마가 햇빛만 뜨면 말라서 쪼글쪼글해져 버립니다. 또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옷을 만들어 입었고 다시 쪼글쪼글해지자 도저히 부끄러워서 에덴동산을 거닐 수가 없어서 숨었습니다. 그런데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아담은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벌거벗었으므로 형벌을 두려워해서 숨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찾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았기 때문에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찾아서 그 음성에 끌려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양심이 벌거벗으면 두렵습니다. 사람들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능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으면 언제나 담대하고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벌거벗은 채로 내버려 놓지 않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제일 처음 가죽옷을 입은 사람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고 에덴을 나갈 때 이제는 무화과나무 잎처럼 구겨질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햇빛이 나도 능히 그를 대항할 수 있는 옷이 된 것입니다. 저주받은 거친 환경과 기후에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가죽옷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상징적인 옷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지어 입은 옷은 벌거벗은 수치와 절망을 피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인간은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의 의복을 만들어 입습니다. 마음속에 어찌하든지 죄책을 가리고 정죄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있어 의로운 행위를 가지고 이것을 덮어 보려고 애를 쓰는데 의로운 행위는 죄악을 덮을 수 있는 옷이 되지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보면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도덕적인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입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기억해 보십시오. 모든 율법주의자들이 돌을 들어서 그 여자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죄를 지은 사람은 돌로써 쳐야 마땅하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쳐다보시고 난 다음 손가락으로 땅에 기록하는데 뭘 기록했는지 분명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감추인 죄악을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 여자의 행위를 돌로서 쳐서 보응을 하면 그 다음 너희들이 돌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돌을 버리고 도망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보니 돌만 다 땅에 떨어져 있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자보고 “여자여 머리를 들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인은 “다 가고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굉장히 위대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 인간은 타락한 이후로 죄를 짓는 시스템 속에 빠져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율법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집에 돌아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한 것은 주님께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때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죄를 짓지않고 살 수 있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은 의인 클럽입니다. 죄없다하는 사람은 세상에 다 있습니다. 죄없다하는 사람은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인 클럽입니다. 그러므로 죄있다하는 사람은 교회로 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벌거벗기고 흉보고 모욕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죄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을 흉보고 벗기고 모욕하려고 하는 사람이 교회와서 그것을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 잘못 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줄 아는데 칭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용서하는 곳이요 죄를 사하는 곳입니다.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와서 용서와 사랑을 받고 변화를 입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이 와서 용서를 받고 변화받는 곳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변화시키는 힘이 없지만 교회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령이 변화를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변화되지 않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변화가 다가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와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 주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무슨 교회 와서 자꾸 죄짓고 또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그게 무슨 교회냐고. 그러나 그 가운데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신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수면 위에 운행하시고 난 다음에 하늘이 생기고 빛이 생기고 생물이 생기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는 곳에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개인도 국가도 세계도 성령이 운행하시면 새로운 세계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도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종교라는 의복을 입어도 위선자를 만들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이 오셔서 변화시켜줘야 위선자가 아닌 참된 의로운 옷을 입은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이 만든 의복은 다 무화과나무 잎과 같은 것입니다. 다 쭈글쭈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여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의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옷이 되고 의의 옷이 되고 영생의 옷이 되고 기쁨과 소망의 옷이 되고 평안의 옷이 되고 모든 면에 우리를 도와주는 옷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지으신 의복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옷을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을 입히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죽일 때 피를 흘렸습니다. 가죽을 벗기려면 피를 흘려야 됩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가죽을 벗길 수 없지요. 그러므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드는 것은 훗날에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의 몸에 피를 흘리고 의의 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줄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받아들이고 자기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2천년 전에 한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매 순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매순간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매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닫고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그 은혜 속에 들어가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기록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그 사람의 힘을 통해서는 종교를 가지나 수양과 도덕을 닦으나 아무리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옷을 입어도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그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어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로 말했는데 그리스도의 흰 옷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의 값을 치루고 사는 것입니다. 보혈은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과거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벗겨버리고 용서와 의의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성경에 보면, 탕자가 돌아올 때 아버지가 뛰어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아버지가 왜 뛰어나가 마중했을까요? 구약시대에 보면 부모에게 무례히 행하고 거역한 자식은 돌로 쳐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집을 나가 재산을 다 탕진가산하고 돼지우리에서 살다가 그도 못살게 되니까 종이라도 삼아달라고 오는 탕자를 동리사람이 보면 돌로 쳐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동리사람이 나와서 돌로 쳐죽이기 전에 빨리 그 아들을 보호해야겠다 싶어 뛰어나가서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 제일 먼저 좋은 옷을 갖다 입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제일 먼저 뛰어나와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와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심판하지 못하도록 뛰어 나와서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원한 사랑으로 뛰어나와서 우리를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탕자가 올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했습니다. 허름한 옷도 아니요, 이전에 입었던 옷도 아니고 최고로 좋은 옷 갖다가 입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허물로 뒤덮인 인생들을 거룩한 옷으로 바꿔 입히시는 것입니다. 자꾸 허물을 벗기고 지적해서 사람을 못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옷으로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허물로 심판 받으므로 우리가 허물에서 용서를 받고 이제 그 허물에 다시 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삶을 옷입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무화과나무 잎으로된 쭈글쭈글한 옷을 입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적적인 의복을 입혀 주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든지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하면 그 말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다 태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운명과 환경을 이기고 생명이 충만한 삶, 금세와 내세에서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복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담력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다 마음에 비록 의심이 꽉 들어차 있더라도 1%의 믿음만 가지면 산을 옮기기 때문에 더 많은 믿음이 없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1% 믿음을 사용하게 되면 자꾸 그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2주전에 제가 기도원에 설교하러 갔는데 기도원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의 13살 된 아들이 기도받으러 왔습니다. 중학교 들어가서 축구부에 있는 아들은 다리가 붓고 아파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뼛속까지 암이 퍼졌습니다. 암이 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점까지 다 암에 걸려 의사가 깜짝 놀라더랍니다. 이러고도 다리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희한하다고 하면서 우리 병원에서는 치료하지 못하니까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대학병원에 가보니 고개를 흔들면서 원자력 병원에 가라고 해서 병원에 가기전에 기도원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 아이가 자꾸 우리 목사님 안수기도를 받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아들을 데리고 오면서도 아버지 마음속에 99%의 의심이 꽉 들어찼습니다. ‘뼛속까지 암이 걸린 자식, 일반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미루고 대학병원은 암전문병원으로 미루는데 어떻게 낳겠는가’ 이렇게 말이에요. 그러나 1%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기도를 받는데 어린 아이가 기도를 받고 느낌이 어떻냐고 물으니 기도를 받으니까 찌릿찌릿 하더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길로 암전문병원으로 가서 사진을 찍으니까 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비이성적인 것 아닙니까? 비합리적인 것 아닙니까? 이것은 인간적인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안믿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미쳤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은 세상적인 믿음이 아니고 창조적이며 하나님과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이성과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창조적인 믿음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사용하면 얼마든지 많은 태산을 옮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믿음인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짜 입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통해서 우리는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자녀가 되고 성령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믿음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이 있습니다. 창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교회는 그냥 매주 왔다갔다하며 종교행위를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주님을 통해서 많은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더럽고 추악하고 가난하고 저주받고 병든 세상의 옷을 벗겨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해진 거룩한 흰옷으로 우리를 입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기적으로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40731-1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