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우리가 항상 짊어지는 예수님의 죽음

by 삶의언어 posted Jul 19, 2024 Views 1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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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예수님
예배드린 날 2009-06-07
오늘의 성구 고린도후서 4장 10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o2MrQ5tdf_s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생명 얻어
그리스도의 죽음 짊어지고 주님과 하나돼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누리는 삶 살아야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명령이 있어서 금식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먹어야만 삽니다. 초식동물들은 풀을 먹고 육식동물들은 초식동물들을 잡아먹고 삽니다. 그렇게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약한 생명체를 강한 생명체가 잡아먹고 사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좀 비극적인 것 같습니다만, 죽음과 생명이 우리 주변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나?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당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절로 5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할 때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이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랍니다. ‘우리가 식인종도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느냐?’ 그러나 주님은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아니하면 굶주려서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우리 생명의 에너지는 음식을 먹음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의 에너지는 예수님을 먹어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고 종교를 먹어서 힘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을 행함으로 힘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고 마셔야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살을 주고 피를 흘려 마시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무슨 수양이나 도덕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몸 찢기고 피 흘려주셔서 우리가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걸머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몸 찢기고 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살에는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파우스트’라는 책에서, 파우스트는 문학가이자 법학자이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의 문제에 부딪혀 마음에 심각한 고민을 한 끝에 도저히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고 자살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종소리가 울릴 때 “네 문제로 내가 죽었고 너도 나와 함께 부활했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후 파우스트는 기쁨과 소망으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을 걸머지시고 몸 찢기고 피 흘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옛사람을 청산해 버리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까? 몸에 짊어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저는 지난 50년 동안 순복음교회를 몸에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잘 때도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깰 때도 순복음교회를 짊어지고,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여행할 때도 항상 순복음교회가 제 어깨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걸머지고 50년의 세월을 지냈습니다. 순복음교회를 걸머진다는 것은 제 모든 관심이 순복음교회에 있고 제가 순복음교회에 그만큼 친밀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그 사실과 굉장히 친밀해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일생의 죄를 짊어지고 빚을 갚아주셔서 우리가 값없이 빚에서 해방되고 용서와 의로움을 얻게 됐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죽음이 내 관심사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부패한 삶이 청산됐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마귀에 잡혀서 꼼짝을 못하고 마귀의 종으로 살았는데, 이 세속과 마귀에서 우리를 놓아주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기고 피 흘려 마귀를 멸하고 세속을 청산하고 우리에게 용서뿐 아니라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또한 우리의 병을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병을 청산하기 위해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사 53: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걸머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마음과 몸의 병을 짊어지고 청산하셨다는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친밀해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저주를 다 속량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죽음을 통해서 나의 가시와 엉겅퀴가 청산됐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인생살이의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가난이 십자가를 통해서 청산됐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가 영원히 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또한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결코 안 죽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별 도리 없이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지 그 속에 사는 영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살다가 그 옷을 벗어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영혼은 새로운 영적인 세계 속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천국에서 깨어나야지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지옥의 고통스러움 속에 떨어져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가는 곳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원한 기쁨이냐 영원한 슬픔이냐, 영원한 즐거움이냐 영원한 고통이냐.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걸머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지옥의 세력을 멸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속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걸머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마음속에 잊지 말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걸머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지 아니하면 그를 통해서 나타나는 용서와 의, 거룩함과 성령충만, 치료, 저주에서 해방, 아브라함의 복, 영생 복락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용서도 받고 의롭다함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치료를 받고 축복을 받고 영생 복락을 얻는 것이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고는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있어야 합니다. 잘 때도 예수님의 죽음, 깰 때도 예수님의 죽음,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일할 때도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친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1절로 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없는데 무슨 생명이 있습니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평생 교회에 나와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금식을 아무리 하고 철야를 아무리 하고 아무리 헌신해도 예수님이 마음속에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이 나와 하나가 돼서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걸머지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납니다. 용서와 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생명이 예수로 말미암아 나타납니다. 치료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부활 영생 천국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걸머지면 생명이 나타납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걸머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걸머지라고 한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만들어 가지고서 진짜로 등에 걸머지고 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등에 걸머진 것처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날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그 의미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도 잊지 말고 예수님이 날 위하여 죽으신 의미를 생각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우리 아랫집에 수진이라는 친구가 살았는데 그 집에서는 아침을 먹을 때 맑은 국물만 있는 죽을 먹었습니다. 그것을 먹고 힘이 없어서 허덕허덕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윗목에 볏가마니가 세 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수진이 아버지, 이렇게 맑은 죽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 윗목에 벼가 세 가마니나 있는데 그것으로 밥을 해먹으면 어떻습니까?” 그러자 수진이 아버지는 숟가락을 탁 놓으면서 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를 죽이려고 그런 소리하느냐? 저 벼 세 가마니는 우리 가족의 생명이다. 봄이 오면 벼 이삭을 뿌려야 하는데 지금 저것을 먹어 버리면 씨가 없어져! 종자씨앗이 없으면 우리 식구들은 다 굶어 죽어! 지금 굶어서 고생하더라도 종자씨앗은 먹으면 안 돼!”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종자를 심어야 합니다. 종자가 없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종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생명의 종자씨앗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종자씨앗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걸머지고 내게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이 나타날 것을 꿈꿔야 합니다.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로움이 들어와서 내가 변화받고 의롭게 되는 것을 상상하고, 거룩함과 성령 충만이 들어와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치료받아 건강하게 되는 것을 상상하고, 내가 가시와 엉겅퀴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고, 부활 영생 천국을 얻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은 내 죽음이 되고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 된 것을 늘 마음속에 바라보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2절에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항상 바라보고 예수님의 부활이 내 몸에 넘쳐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채운다는 것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입으로 말해야 합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생명 내 생명”이라고 늘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의 큰 지방마다 선교회를 설립하고 큰 희생과 겸손으로 복음을 전해 중국 선교의 문을 여신 분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 자신도 극심한 영적 빈곤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는 죄인이고 무능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테일러는 한 친구의 편지를 받고 난 다음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친구가 쓴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으면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 죽음이 내 죽음이 되면 예수 부활도 내 부활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속에 계시므로 내가 그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내 힘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힘으로 살게 된다. 예수 힘으로 의롭게 살고 예수 힘으로 거룩하게 살고 예수 힘으로 건강하게 살고 예수 힘으로 저주를 이기고 살고 예수 힘으로 영생 천국을 누리게 된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부활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고 살아라” 이것이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사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 굉장한 기도의 힘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고 활력이 생겨서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을 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우리 속에 살아 있다고 믿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생명의 영양분이 된다고 생각하니 황송하기만 합니다. 내가 밥을 먹듯이 예수님의 살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산다니 이렇게 황송할 수가 없습니다. 성찬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매시간 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몸을 먹고 항상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된 것을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고 나와 같이 되셔서,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고 예수님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이 되고 예수님의 치료함이 나의 치료함이 되고 예수님의 축복이 내 축복이 되고 예수 천국이 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의롭게 되고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건강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축복받게 되고 예수님처럼 천국백성이 되셔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의 씨앗이 되신 예수님을 우리가 항상 몸에 짊어지게 도와주시옵고, 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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