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제일은 사랑이라

by 삶의언어 posted Oct 13, 2024 Views 1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ESCClos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Extra Form
오늘의 주제 사랑
예배드린 날 1987-08-09
오늘의 성구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RFFe5Niv_GM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지금 불한당 만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죄에 짓밟히고, 마귀에 찢기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정죄할 더많은 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저 장엄한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를 살려주고, 도와줄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 사람을 구원한다고 나온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 종교자체는 좋지만은 여러분, 율법으로써 사람을 구원할 수 있나요?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을 본적이 있나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앞에서, 사람이 올바르게 설 사람이 있나요? 율법, 종교로써 구원받을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중에서 태어났고, 죄를 먹고 마시고 살아가기 때문에 죄인 아닌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증거하는데마다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주시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철학을 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특별한 윤리와 도덕적인 강연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근처에 사람이 오면 병이 낫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갑니다, 절망에 처한 자가 소망을 얻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문제에 꽉들어찬 사람들은 예수께로 나오면 삶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실존의 절망에 처한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가려고 하고, 예수님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하고, 예수님 그림자라도 스쳐가기를 원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이 시간에 여러분과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볼지어다, 세상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사시면서 무엇이 여러분의 생활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아마 "돈이 제일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된다."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권력이 제일이다. 권력만 잡으면 돈이나 모든 것은 그대로 굴러 들어온다." 이렇게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남편이 제일 중요하다, 아내가 제일 중요하다, 자식이 중요하다, 부귀.영화.공명이 중요하다, 청춘이 중요하다,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가지가지로 튀어날올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고있습니다. 사람이 방언을 많이 해서 여러나라말을 유창하게 하고,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과 비교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 미래를 환하게 보고 앞날을 다 미리 알고 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혹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해도 사랑과 비교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다 굳이 하고,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그러한 헌신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비교하면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요,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고대왕실 높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잘 산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모래를 집짓고 사는 거와 한가지입니다. 저는 30년의 목회생활을 통해서 잘사는 부자도 많이 보았고, 권력자도 많이 보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들 속에는 그것이 삭막한 황야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거듭거듭 보았습니다. 삼간초옥에 살면서 풋나물을 먹고살아도 사랑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랑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마음이 피투성이가 된 아내들도 많고, 아내의 사랑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남편들도 많습니다. 부모의 사랑에 실망한 자녀도 있고, 자녀의 사랑에 실망한 부모도 있습니다.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심정을 가지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세상에는 무서운 경쟁속에 살기 때문에 더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식어지므로 사람들은 소외되고, 몰인정과 무정가운데서 찢긴 가슴을 안고 피를 흘리며 울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우리는 사랑을 얻을 수가 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해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로써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문학작품에서만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노래한다고 사랑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증명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증명되지 않는 사랑은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증명하셨으니 하나님은 그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농도는 무엇을, 어떻게 주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적게 사랑하면 적게 주고, 많이 사랑하면 많이 줍니다. 적게 사랑하면 가치 없는 것을 주고, 많이 사랑하면 가치 있는 것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를 이처럼 사랑했는데 그 증명된 사랑은 그 농도는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여러분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면에서 우리의 생활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높이 매달렸을 때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의 생활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사랑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용서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모두다 죄중에 태어나고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을 우리 자신이 압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말했었으며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사람도 남김없이 우리는 다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이요, 이대로 살면은 영원히, 영원한 지옥에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사랑하시되 구체적으로 예수 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여러분과 내가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예수께 다 짊어지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 나의 죄, 여러분의 불의, 나의 불의를 다 당신의 몸에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몸을 찢고, 피를 쏟아서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는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은 여러분과 나에게 능력을 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무능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전도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가 무능하고, 능력이 없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하나님과 우리와 원수된 담을 헐어버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과 나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씀하시며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게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남녀노유, 빈부귀천할 것 없이 하나님을 믿고 나오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능력있는 삶을 살도록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여러분과 나를 마귀에게서 해방시켜주시며 가지가지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에서 치료함을 베풂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병든자를 보고 막연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최후에는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성경은 밝히 말씀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병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님의 사랑은 여러분과 나를 치료하는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과 나를 저주에서 해방시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이후로 우리는 저주를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사람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어 먹고사는 비극속에 처했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되고, 과학이 발전해도 인간의 삶의 고달픔은 여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낭패와 실망의 가시와 엉겅퀴가 돋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누가 이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온 이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저주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저주받은 족속인데 저주와 상관이 없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저주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바로 여러분의 저주, 나의 저주, 여러분의 실패, 나의 실패, 여러분의 파멸, 나의 파멸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나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베푸는 사랑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에게 다가온 가장 처절한 절망은 죽음입니다. 무엇이 두렵다고 해도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아버지를, 우리의 어머니를,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이웃을, 친구를 빼앗아갑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파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러므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여러분과 날 대신 죽게 해서 무덤 안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불태우고, 죽음을 죽여버리고 승리하게 일어나게 하셔서 그 안에서 여러분과 내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그 위대한 힘을 주시게 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구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주심으로써 나타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절대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남편을 믿어요? 아내가 나를 사랑 안 하는데 내가 그 아내를 어떻게 믿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 안 해주는데 자식이 어떻게 부모를 믿어요? 자식이 부모를 사랑 안 하는데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믿어요? 우리가, 이웃이 나를 사랑하면 믿을 수 있으되 나를 미워하는 원수를 내가 믿을 수가 있나요? 여러분, 원수를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믿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믿음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모든 인간의 행동이란 여러분, 믿음 위에 설립되는 것입니다. 국민은 정부를 믿어야되고, 정부는 국민을 믿어야됩니다. 우리는 은행을 믿고 돈을 맡겨야되고, 우체부를 믿고 편지를 부칩니다. 우리는 의사를 믿고 몸을 맡깁니다. 이와같이 이세상의 모든 삶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데 우리가 오늘날 과연 믿을수가 있나요? 수없이 많은 사람이 믿음에 배반당하고, 사기 당하고, 속고, 그래서 찢긴 가슴속에 마음속에 불안과, 염려. 초조와 불신이 꽉들어차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이 기반이 되면 무엇이든지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믿을 수 없으되 사랑은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은 믿을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써, 글로써 만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가를 지불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여러분과 나의 생활 속에 나타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린 하나님의 사랑만은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의 가슴속에 믿음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을 수 있나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생이라도 내가 예수앞에 나오면, 예수를 통해서 내 죄를 갚기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감정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배우 한사람이 내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헐리우드에 나온 배우인데 그가 한동안 예수를 잘 믿었다가 그만 여자관계에 빠져가지고서 예수님을 완전히 져버리고, 교회도 나가지 않고, 하나님을 져버리고 살다가 정신적인 무서운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자 그 마음속에 기쁨이 사라지고, 그 마음속에 평화가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되고 신경쇠약증에 걸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거리 전화를 걸어서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내가 다시 예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나같은 사람을 살려줄 수 있습니까? 나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옛날에 느끼던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전화를 통해서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마음의 감정을 따라서 사랑을 받았다가 안 받았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당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그 아들 몸을 찢고 그 아들 피를 쏟아서, 당신의 죄를 청산해서, 당신은 다른 것 다 믿을 수 없으되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하오. 당신의 감각을 믿을수가 없어요. 당신의 감정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왜? 당신은 일단 타락했기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화인 맞아서 그 부드러운 양심이 다 짓밟혀버리고 말아서 이제는 마음의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을수는 없소.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오. 당신은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니깐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를 다시 구주로 모시고 들어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든 사람과 함께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신답니다." 저는 그런 전화를 하고 기도를 해 주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그리그도 앞에 나와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은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로써 구체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사랑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주심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에게 성령이 와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의심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나의 무능력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그 몸을 찢어 화목 제물로 삼고, 원수된 담을 헐고, 여러분과 나에게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믿으면 성령이 우리가운데 와 계신 것을 우리는 믿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 다 의심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해서는 안 되요. 눈을 의심해도 좋아요. 귀를 의심해도 좋아요. 여러분의 생각을 의심해도 좋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않고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믿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성령과 함께 살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이 땅에서 승리자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고침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건강해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이 당장 나아지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직 건강하지 못하고, 아직 몸에 고통이 다가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그 우리를 치료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이 등어리에 채찍을 맞도록 했었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의 등어리에 사십여하나가는 매를 때렸었습니다. 그 등어리가 터지고, 살이 찢어지고, 선지피가 흘렀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에게 친히 담당케하시고 우리 병을 짊어지고 가게 하셨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치료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건 믿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줄기차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완전한 치료를 다가올 때까지 불퇴전의 기도로써 믿고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치료하기는 것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주함에서 놓여남 받고, 낭패와 실망에서 벗아남받고, 성공과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내 환경이 그렇게 되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내가 저주에서 해방 얻기를 그렇게 원f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저주 모두를 예수에게 책임 지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발가벗고 저주받은 표적이 되어서, 매달리셨으니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저주를 제끼고 여러분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하겠다고 그렇게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밀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그 사랑이 여러분과 나의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저주를 제하시고, 여러분께서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총과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남에게 도움을 베풀지언정 남의 짐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구체적으로 이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마땅한 일입니다. 심장의 마지막 고동이 중지할 때가 옵니다. 눈에 모든 광채가 떠날 때가 옵니다. 손의 힘이 다 떠나갈 때가 오는 것입니다. 호흡이 끝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서 죽음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사도처럼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예수의 사랑을 믿을진대 우리는 사망의 캄캄하고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있으면 그 무덤을 지나서 하나님은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천국의 고장으로 옮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와도 하나님 사랑을 붙잡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다 거짓되어도 순수한 사랑은 거짓될 수 없습니다. 위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증명된 그 사랑이 거짓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내가 오늘날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지 이 세상 아무 것도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을수가 있으면 그러면 우리속에 소망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노사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경제가 주름잡히고 곤두박질을 칠 위험 속에 놓여있습니다. 만일 8월 한달 만 더 계속해서 전국적인 파업이 계속한다면 한국의 경제는 이제 몇십년 후퇴를 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삼저 시대에 잘살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것은 휴지쪽지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한국은 또다시 저 남미 여러 나라와 같이 선진국이 되려 고하다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후진국의 수렁에 빠진 것처럼 처참한 수렁에 빠지고 말 것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 한국이 이 노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살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등민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2등국민이 1등국민으로 살 자격은 없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놈들이 무얼 잘살겠다고 큰소리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노사분쟁의 현장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길은 사랑의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들어오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국회에서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한다고 해서 법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여서 주먹을 들고, 기계를 파괴하고, 공장을 불태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이 있어야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세례를 베풀어주어서 기업주가 노동자들을 자기처럼 사랑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했는데 내 몸처럼 노동자들을 사랑한다면은 그 사랑은 이심전심으로 노동자들의 가슴에 심금을 울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기의 생계를 이어가는 직업현장을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가 몸담고 살고, 자기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가는 그 작업현장을 사랑하지 않고, 그것을 짓밟아버리고, 기계를 두드려 부순다면은 결국 누굴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사랑이 없이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원수로 생각하지 말아야되며, 노동자도 기업주를 원수로 생각하지 말아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업가는 아무나 되지 않습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기업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사를 주어서, 하나님이 세워주어야 기업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노동자를 기업가의 자리에 앉혀 놓는다고 해서 기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므로 기업가 한사람이 기업을 잘하므로 수만명, 수십만 명이 밥을 먹고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 하는 사람을 원수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역적으로 돌려서는 안되는것입니다. 그리고 또 노동하는 사람들을 짓밟고 무시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은 신뢰하게 됩니다. 신뢰하게 되면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업자가 노동자를 신뢰하게되고, 노동자들이 기업가를 신뢰하게되고, 신뢰하게되면 서로 대화하게 되고, 대화가 이루어지면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한국에 필요한 것은 사랑의 세례를 받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정치가들도 사랑의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기업가들도, 노동자들도 사랑의 세례를 받아야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면 서로 믿을수가 있고,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면 대화를 통해서 소망찬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바로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을 때 용서받을 소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무능력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성령을 모셔들이고 의지할 때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소망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절망에 처했으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고쳐지는 것을 믿을 때 마음속에 건강하게 될 소망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에 처하고, 낭패에 처하고, 살길이 막연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저주를 옮기시고, 우리를 잘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있는 것을 믿게될 때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폭풍우처럼 휘몰아쳐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죽여버렸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될 때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얻게됩니다. 어둡고 캄캄한 죽음의 터널을 지날 때도 우리는 찬란한 천국의 소망이 마음속에 넘쳐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능히 받아들여서 소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소망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소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소망의 촛불이 어두워지는 이유가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정부가 국민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정치가들이 국민을 신뢰하지 못하고, 국민들이 정치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기업을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또 기업 하는 사람이 노동자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소망의 촛불이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한국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례 받아야하며, 사랑의 기반 위에 서서 신뢰해야 되고, 신뢰 속에 소망이 넘쳐나면 사람이 긍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이 긍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환경이 좋아야만 긍정적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데 이것은 소망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태양이 비추는 날도, 비오는 날도, 바람 부는 날도, 조용한 날도 소망을 가지고서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소망이 있으면 여러분과 내가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소멸을 걷어올리고 적극적으로 문제에 대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서 전력을 기울여 일을 해보자, 기업가도 노동자도 손을 합쳐서 기업을 일으켜보자, 사업을 확장해보자, 수출을 더 해보자, 경제적으로 좀 나은 내일을 건설해보자. 소망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창조가 있고 생산이 있습니다. 소망이 넘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냅니다. 음악을, 예술을, 기술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나은 내일을 생산해낼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자본 없이 물질적인, 경제적인 부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보다도, 다른 물질보다도, 마음속에 가지고있는 이 정신적인 자원인 것입니다. 마음이 황폐해진 개인이나, 마음이 황폐해진 민족치고 흥할 수 있는 민족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이 기로에 선 것은 한국 민족의 가슴속에 정신적인 자원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도 없고, 신뢰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물에 떠내려가는 나무덩어리처럼 세류에 흘리워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릴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 조국과 민족이 이 기로에서 살아나갈수 있는 길은 오늘날 전 민족이 십자가 밑으로 모여드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사랑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어요. 나는 과학자들이 시험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원숭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품에서 떼어내서 금속으로 만든, 원숭이 옷을 입힌 금속 곁에 키웠었습니다. 그는 차가운 금속만 느꼈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 원숭이가 자라서 나중에 엄마가 되었는데, 원숭이 새끼를 낳게 했는데 그 새끼를 키우지 않아요. 그는 사랑을 받아본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새끼가 아무리 따라와도 새끼를 발길로 차버리고, 새끼에게 젖을 먹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야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반만년 역사동안에 수없이 짓밟히고 찢기는 가운데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황폐한 가슴에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성령으로 부음바 되어서 내가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치가도 사랑을 체험해야 됩니다. 기업가도 사랑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들도 사랑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사랑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없는 삶을 사는 것은 여러분, 삭막한 광야에서 사막을 지나가며 사는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사랑의 표상인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사랑을 체험하여 여러분의 인격에 변화가 다가오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만이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폭력은 일시적으로 굴복을 시킬 것 같지만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완력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협박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녹이고, 강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이 들어오게 되면 믿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믿을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 가정이나, 한 사회나, 국가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신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군대가 없어도 좋습니다. 양식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신뢰를 잃어버리면 나라는 망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 서로서로의 신뢰는 서로서로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믿어지고, 믿어질 때 비로소 소망이 넘쳐나는것입니다. 여러분과 내 마음속에 소망이 솟구쳐 오르면,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게되고, 이 마음의 자원 위에서 정치도 잘되고, 경제도 잘되고, 나라살림도 잘되고, 교회도 잘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바로 인생에 성공이냐, 실패의 갈림길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제 저녁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민족이 어디로 갈려고 이렇게 합니까? 여태까지 매를 맞았는데 아직도 매를 더 맞으려고 이렇게 합니까? 왜 우리 민족이 서로 물고, 찢고, 싸우고, 국민경제가 도탄에 이르도록 이렇게 갑니까? 이웃나라 일본 사람들은 예수도 믿지 아니하고, 우상 천지에 사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잘사는데 왜 우리는 이렇습니까? " 내 마음에 조용한 양심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일본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이 세상에서 복받고 살 수 있는 태도가 되어있다. 일본사람의 마음이 정직하고, 성실하고, 근면하고, 충실하고, 단결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마음의 바탕위에서 이 세상에 복을 누리고 살게된다. 너희들은 정직하지도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하고, 근면하지도 못하고, 서로 물고 찢고 싸우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복을 주려고 해도 복을 받을 그릇이 없음으로 오늘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너희가 마음에 그릇만 준비한다면 너희는 일본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믿는 백성이니 어쩌 하나님께서 손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겠는가? 너희에게 얼마나 축복을 주기를 원하지만 은 너희의 마음의 바탕이 이 모양이니, 어디에다가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느냐?' 나는 그 마음에 양심의 소리를 듣고 땅을 치고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해서 이민족의 정신이 개조될 수 있습니까? 언제 이민족의 마음이 황량한 사막에서 개조될 수 있습니까?" 거기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이 나라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희망을 가지는 국민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온 조국과 민족이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온 조국과 민족이 십자가 앞으로 모아 들어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변화 받는 사람이 되어라." 이것만이 개인이 살고, 나라가 살고, 영원히 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241013-0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