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신앙생활과 고난

by 삶의언어 posted Nov 22, 2024 Views 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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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전도/선교
예배드린 날 1988-06-19
오늘의 성구 시편 23장 4절로 5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wi0c8rVg674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과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항상 크고 작은 고난의 연속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고난이 마음의 고난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그 고난이 가벼운 고뇌일 수도 있고 절망적인 심한 타격을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고난은 의인에게도, 죄인에게도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강해지면 고난을 다 이기고 고난이 전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보다 믿음이 더 강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밝히 말씀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일지라도 받은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조차 고난을 통해 그 순종이 완전해 졌다면 우리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고난이 어떤 연유에서 다가왔던지 간에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대처함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튼 축복이 솟아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잘못 받아들이면 고난은 가시밭 길이 되고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어떠한 고난들을 당할 수 있으며 그 고난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야훼께서 함께 계심이라 야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케 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통과하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회개케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평범하고 평탄한 생활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본주의로 육신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로는 견딜 수가 없고 육신의 삶에 견딜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오면 사람은 그때 깨어져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을 보십시오. 그가 사울일 때는 무지막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채찍으로 때리고 스데판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일을 총지휘하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의 허락을 받아 시리아 다메섹으로 피난 간 기독교인들까지 다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종자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수리아의 햇빛은 소나기같이 쏟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메섹이 다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런 햇빛이 대낮보다 더 밝게 주위를 비추어 사울은 놀라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땅에 엎드려 있는데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외쳤습니다. '주여 뉘시이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래서 주님의 계시를 받고 일어나니 그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손을 잡고 인도해서 다메섹의 직가의 유다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흘 밤낮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금식하며 그는 회개하고 통회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아나니아라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와서 그에게 안수하매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면서 눈이 다시 보이게 되고 다시 회개하고 안수 받고 세례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 매를 맞아 장님이 되지 않았으면 그는 결코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요 위대한 하나님의 이방인의 사도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 고통을 보내십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11절에 "또 아들들에게 권한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아들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우리가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신앙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육신,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에 걸려 그만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고치시기 위해서 채찍을 들어 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를 기르기 때문에 너무 잘 압니다.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엄하게 교육시키고 잘못하며 꾸짖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것입니다. 미운 자식일수록 방종 시키고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엄하게 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방종 시키셔서 마귀의 자식으로 전락하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가 잘못할 때 징계의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부형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부인이 주일 아침에 '오늘은 교회에 나가야 해요'하니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을 보고 교회를 갈테니 먼저 가 있으시오'하고 차를 타고 나오면서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나는 오늘 골프장에서 골프 예배를 본다'하고 골프장을 향해 달리다가 어느 순간에 깜빡하여 꽝하고 어디에 부딪혔습니다. 보니 전봇대를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차 앞부분이 찌그러져 보통은 운전자가 죽었을 덴데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차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차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하나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주일에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치지 않겠습니다. 아내 말대로 교회 가서 예배드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다시는 주일을 어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탁해도 한 대 맞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맞고 나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제게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담배 피지 말라고 하면 교회에 안나오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고 담배 피우고 교회 나오세요. 예수님 잘 믿으시고 담배도 많이 피우세요'하니 '목사님이 마음이 넓으셔서 참 좋군요. 이제 안심하고 담배도 피우며 교회에 나오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간절히 '주님이시여 예수를 잘 믿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안수 기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안심하고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는데 성냥의 불똥이 튀어 눈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눈이 안보이고 충혈이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해보니 0.1mm만 더 안으로 불똥이 튀어도 실명할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나와 그는 '이놈의 담배가 원수다'하고 담배를 꺾어 던져버리고 담배와 이별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셔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 앞에 올바르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우리는 정말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애 속에 끊임없이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순종을 배울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믿음을 연단 하실 때 반드시 고통을 주십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시험을 통하지 않고는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축복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믿었는데 축복은커녕 오히려 시험이 다가 왔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냐 거짓된 것이냐를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신 후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믿음은 연단과 시련, 고난을 통해서 만이 온전해 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원수 마귀의 공격으로 해서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당한 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이 아니라 마귀가 준 고통입니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절대로 이방 신에게 절하지 않았는데 느브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세워놓고 천하 만민을 불러놓고 그 금 신상에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왕이 진노하여 이 세 사람을 묶어 7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져버렸습니다. 몸이 타서 가루가 될 줄 알았는데 풀무 불에 들어간 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제 4의 사람과 함께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묶은 밧줄은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놀란 느브갓네살 왕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여 그 곳에서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왔을 때 왕이 보니 그들의 머리카락도 타지 않고 옷에는 불 탄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조차 거꾸러져 회개하고 만군의 야훼를 믿고 경외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당한 공격은 사탄의 공격입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핍박이 아닙니다. 사탄이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핍박인 것입니다. 바울 선생이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던지 살 소망조차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그 때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로 38절에 보더라도 과거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오늘날 이 같이 편안하게 예수 믿게 된 것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휴전선 바로 건너편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처럼 편히 예배드리지 못합니다. 예배드리다가 잡히면 추방당하거나 사형을 당했습니다. 요즘도 지상에서 예수님을 믿다가는 무수한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 하늘 아래, 자유의 땅에서 마음놓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원수 마귀는 오늘날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멸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공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많은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자원하여 얻는 고통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가 자원하여 당하는 고통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 자신의 재산과 청춘을 다 받쳐서 복음을 위해 나가 죽을 고생을 하는 이런 고난은 하나님께 크게 영광된 고난인 것입니다. 이는 대속의 고난이요 이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고난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아시아에서 고난받은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1장 8절로 10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11장 23절로 29절에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3번 퇴장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고 3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함과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가만히 집에서 사업하고 살았으면 얼마나 잘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선교하는 것이 그리 편안한 생활은 아닙니다. 선교사로 나가는 것은 고생을 자처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인들은 변을 본 후 반드시 손으로 닦고 그 손을 먼지에 문지르고 또 그 손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같이 그렇게 먹지 않으면 복음이 증거 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가 있는 한 선교사는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그 종족에게 들어가서 같이 변을 보고 손을 닦고 그 손으로 밥을 먹으려니까 지옥 같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것은 극복했는데 아이들이 아프리카 아이들과 놀면서 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이 곳에 와서 그렇게 하지만 저 아이는 무슨 죄로 이렇게 끌려와 저렇게 자라야 하는가하는 생각으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국에서 목회 하면 편안하게 대접받으며 목회 할 수 있는데 왜 아프리카에 가서 그런 고생을 합니까?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께 영광된 고난인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쪄 박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신학 박사요, 음악 박사요, 문학 박사, 철학 박사이자 의학 박사였습니다. 독일에 있었으면 정말 잘 살았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을 아프리카에 던져서 그 곳에 나환자촌을 건설하고 문둥병환자를 치료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인도에서 죽음의 집을 경영하고 있는 테레사 수녀를 보십시오. 그는 켈커타에 수녀원을 설립하고 길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인생을 불러다가 목욕시켜주고 옷 입혀주고 죽을 때 물을 떠 먹여주고 편안히 죽도록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일을 하고있는 줄 모릅니다. 그냥 자신의 고향에 있었으면 편안히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선교하기 위해서 나가서 고난을 자처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 곳에서 편안하게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일 년에 한 번 선교 헌금을 작정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외국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은 고향산천 떠나 여간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교사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데 인색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면 넷째로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은 너무나 잘 압니다. 죄인이 매를 맞아 신속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나오면 그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요, 예수 믿는 사람이 고통 당할 때는 이것은 징계를 받는 것이니 우리가 불순종과 불신앙을 회개하고 빨리 주님께 돌아오면 그 채찍은 중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믿음의 연단을 당할 때는 끝가지 참고 견디면 그 연단에서 나와서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요, 우리가 자원해서 고난을 당할 때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 찬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특권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내세에 하나님의 크신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이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은 우리가 당하면 당할수록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세상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주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신앙의 보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연단 된 믿음을 가진 후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한 단계 더 높은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한 믿음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 놓은 다음에야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축복의 집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작은 집은 기초를 파지 않습니다. 그러나 빌딩은 밑으로 깊이 기초를 파서 그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의 심령을 깊이 파헤쳐 믿음의 깊은 기초를 놓으신 후에 하나님의 축복의 집을 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할 때 원망이나 불평, 탄식하지 말고 부정적 마음을 가지지 말고 회개하고 깨어지고 더 하나님 중심으로 서고 참고 견디고 감사하며 나가면 고난은 오히려 변화되어 우리에게 큰 축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원수 마귀가 와서 우리를 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려 하는데 원수 마귀가 와서 정부, 이웃, 사회단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가져올 때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원수가 올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원수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면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올 때 하나님의 말씀도 더 계시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도 더 받게 하시고 환경도 더 번창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가 우리를 치려고 하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반대의 일을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원수 앞에서 더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잔이 넘치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원수가 올 때 우리는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원수가 오면 마음에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게 밥상 차려주실 때가 됐구나'원수가 오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셔서 잔이 넘치게 될 때가 왔구나'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원수들의 공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기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고난은 즐거운 체험은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고난 없이 살면 좋겠지요. 그러나 고난 없이는 하나님과의 깊은 신앙의 교제를 할 수 없습니다. 고난 없이는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인격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는 광석이 금, 은, 동이 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의 풀무 불에 들어가서 깨어져야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되며 굳건한 믿음을 가진 참된 신앙 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통해 우리는 원수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떡과 밥을 많이 먹은 자만이 강하고 존귀한 인격의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렇게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한 마디로 "우리의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길 원하노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인데 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시련과 환난,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중, 고등 학생들이 조금만 힘들어도 '공부하기 힘들다'며 자살을 합니다. 부모님들이 이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학생들은 놀고 싶은데 자꾸 공부하라고 하니 괴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서운 입시 지옥 때문에 그들의 스트레스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통과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잘 못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장차 장성하여 사회에 나가서 잘 살고 성공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에 울면 나중에 웃고 현재 웃으면 나중에 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잠깐 고생을 통해 나중에 웃으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모님들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지금의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 울게 될지라도 얼마 있지 아니하여 하나님을 향해 찬미하고 웃으며 살고 영원히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살도록 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그러나 눈물을 전혀 뿌리지 아니한 자는 기쁨으로 단을 안고 돌아오지 못하고 통곡하고 절망하며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 인이 다 되십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근본적인 뜻은 환난이 아니요 평안이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며, 질병이 아니라 치료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만한 하나님의 축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불을 통과하여 자격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환난이 있어야 하고 환난을 통하지 않은 축복은 축복이 될 수 없는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만 좋아하고 구하지 말고 축복 전의 환난도 감사히 받아들이고 달게 받아들여서 축복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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