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야훼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세기 9장 18∼27절
노아의 허물을 덮어준 자녀가 축복 받아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청산하신 예수님
용서와 사랑이 있어야 진정한 신앙
어릴 때를 생각하면 항상 저의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는 추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추운 겨울밤 이불을 차내던지고 잘 때 다시 덮어주시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입니다. 한 여름이면 덥다고 배를 드러내고 잘 때 홑이불을 덮어주시던 그 사랑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지 못합니다.
성경은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기 보다는 드러내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므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십자가 위에서 다 청산하시고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을 사랑으로 변화시켜서 우리를 덮어주신 것입니다.
1. 술 취한 노아와 세 아들
노아는 홍수 전의 사람인데 홍수가 지나고 난 다음에 농사를 지어서 포도즙을 잔뜩 짜서 단지에 담아 놓고 마셨습니다. 인류역사상 제일 먼저 술취한 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의인이요 완전한 노아였지만 술을 잔뜩 먹었으니까 안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술 취하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아는 술을 먹고 취해서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었습니다. 그때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 장막에 들어갔다가 아버지가 드러누워서 벌거벗고 있는것을 보고 밖에 나가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고 오히려 다른 두 형제에게 경멸과 조롱의 태도로 알림으로써 아버지를 나중에 격노케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함의 이야기를 들은 형인 셈과 동생 야벳은 달랐습니다. 가서 옷을 가지고서 어깨에 걸머지고 바로 걸어가면 아버지 하체를 볼까 싶어서 뒷걸음질 치면서 아버지 하체를 덮었습니다. 덮고 난 다음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나왔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도와주려는 간절한 마음이 그 아들들에게 있었습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9장 23절에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실수와 수치를 방관하지 않고 그 허물을 덮어주려는 사려깊은 행동으로 아버지의 명예와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노아가 아들 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듣고 난 다음 함에 대해서 격노하고 저주했습니다.
창세기 9장 24절로 25절에 보면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시대에 셈족속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 당하고 대부분 종으로 전락했고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정복당해서 셈의 종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셈은 하나님께서 노아가 축복하기를 창세기 9장 26절에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야훼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또 창세기 9장 27절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셈, 함, 야벳의 복이 아버지의 축복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부모가 축복을 하면 그 축복을 하나님이 내려 주시고 부모가 저주하면 그 저주를 하나님이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축복은 그 자손들에게 이루어지고 저주도 그 자손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훼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잘살고 싶으면 부모를 잘 모셔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2절로 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셈과 함과 야벳의 이야기를 통해서 ‘덮어준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님이 하루는 우연히 독성이 강한 코브라와 검은 맘마뱀이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독이 강한 코브라가 맘마뱀을 물어서 죽여 먹었는데 그 독 때문에 코브라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향한 비난과 비판이 상대방을 죽일 뿐 아니라 나중에 두고 보면 자기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남을 벗기거나 벗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결국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화를 당하고 저주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용서
예수님이 이른 아침에 성전에 갔는데 많은 사람이 한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 여자가 간음하는 것을 우리가 현장에서 잡았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잡히게 하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먼저 돌로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돌을 버리고 모두 떠나가 그 여자와 돌만 남았고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 죄짓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주의자의 율법을 꾸짖고 그 위선을 들추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물을 덮어 주었습니다. 사랑으로 덮어준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해서 죽이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지만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풍성히 얻게 하러 오신 것입니다. 정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용서로 덮어주는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도 예수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예수께 나오면 주님께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로 14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씀합니다. 용서만 하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정치인들이 해변가를 걸으면서 어떤 특정인의 정치 생명을 끊어버리자고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부가 게를 잡고 있었고, 큰 바구니에 게를 잡아넣는데 게들이 자꾸 도망치려고 함에도 뚜껑을 덮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해 하던 정치인이 왜 뚜껑을 덮지 않느냐고 묻자 어부는 “걱정할 것 없어요. 게는 정치인과 똑같아서 끌어내리기를 잘합니다. 한놈이 기어나오면 밑에 놈이 잡아 당겨서 다 떨어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터넷 악성 댓글로 남의 허물을 끊임없이 들추어 내고 할큅니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정보를 빨리 전달하는 좋은 면도 있지만 남의 허물을 통해서 할퀴고 들추어내고 상처 입히고 인터넷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3장 14절로 16절에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은 아담 범죄 이후 늘 불안과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모이면 늘 문제가 발생합니다. 약한 자는 염려하고 강한 자는 비판합니다. 우리 교회도 한가지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신앙이 강한 사람도 있고 신앙이 약한 사람도 있고 오래된 분도 있고 초신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모이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지만 원망, 불평, 탄식, 비평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남을 비판하려고 하기 보다는 덮어주려고 해야 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일곱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합니다. 둘째, 우리는 상대방의 동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셋째,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넷째, 그 상황에 있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섯째,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여섯째, 우리에게는 편견이 있고 시야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일곱째, 우리는 불완전하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결점도 많을 뿐 아니라 장점도 굉장히 많습니다. 결점만 보고 말하지 말고 장점을 보고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갖다주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남의 흠짐을 말하면 그것이 나에게 상처를 갖다줍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면 그것이 내게 축복을 갖다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가족과 부부간에는 장점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고 장점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야곱이 20년 동안 외삼촌 집에 살다가 아내와 자식들과 재산을 많이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형이 한을 품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동생 야곱에 대해서 한을 품고 있는데 사람을 보내서 동생이 온다고 하니까 그 한풀이를 하기 위해서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옵니다. 동생 맞으러 오는 형이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는 죽이려고 작정하고 오는 것입니다.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재산을 앞세우고 형의 마음을 녹여 보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그 뒤에 따르게 하고 그리고 자기는 얍복강 이쪽 건너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야곱이 고집이 세고 자기만 살려고 욕심을 부렸던지 밤새도록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해도 항복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항복을 안하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지자마자 그 마음속에 ‘이제는 달아날 수도 없고 나만 살 수 없으니 변화를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되니 형을 보는 시각도 변화되었습니다. 절뚝절뚝 절면서 오는 야곱을 보니 형의 마음도 녹아내렸습니다. 형이 뛰어오더니만 야곱을 끌어 안고 목을 잡고 둘이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살벌한 분위기가 사랑으로 넘치는 분위기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 남편이 변화되기를 원합니까? 아내가 먼저 변화되십시오. 자기부터 먼저 회개하고 변화되면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남편들도 자신이 먼저 변화되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아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를 살펴보지 않고 남의 잘못만 지적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아니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본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비평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비평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 장발장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주인공 장발장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그를 잡아서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형사 자베르가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혁명군이 자베르를 잡았습니다. 장발장은 혁명군 중에 한 사람인데 혁명군이 자베르를 총으로 쏴 죽이려고 할 때 장발장이 말렸습니다. 자베르가 장발장에게 “왜 당신은 나를 안 죽입니까? 당신이 제일 나를 미워해 나를 죽이고 싶어할텐데 왜 안죽였습니까?”라고 묻자 장발장은 “이 세상에 넓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바다가 땅보다 넓고 하늘은 땅보다 더 넓습니다. 그런데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는데 용서라는 마음은 하늘보다 더 넓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평소에 차갑고 냉혹하기로 유명했던 그 형사도 장발장의 용서에 무너지고 변화됐습니다.
한겨울의 얼음은 따뜻한 봄바람이 불면 녹아내리고, 모질어진 마음은 사랑과 용서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채찍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용서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봄이 오면 겨울은 물러가고 얼음이 녹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변화되면 상대방이 변화됩니다. 조지 허버트는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가 건너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고 말했고, 빌리 제올리는 “하나님은 큰 지우개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미얀마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세탁소 주인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 가게의 옹기그릇 만드는 주인이 이를 시기하여 왕에게 고하기를 “저 사람이 세탁을 하고 아무리 더러운 옷이라도 깨끗하게 한다고 자랑을 하는데 왕궁에 있는 검은 코끼리를 희게 만들라고 명령을 한번 내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왕이 명령을 하자, 세탁소 주인은 코끼리가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옹기그릇 주인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 만들지 못하고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일은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3.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와 형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두 아들이 나오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창기와 더불어 다 탕진하고 맙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서 돼지에게 주는 쥐엄열매도 없어서 굶어죽게 됐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게 됐습니다.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회개합니다. 마음도 병들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채 이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게 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로 늘 아들 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보던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오는데 더할 나위없이 기쁩니다. 종들을 시켜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우리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우리에게 용서와 의의 옷을, 성령의 인치심인 가락지를 끼워주십니다. 그런데 형은 율법주의자입니다. 형은 동생이 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고 분에 찹니다. 동생의 잘못을 일일이 지적하는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를 심판하는 형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것입니다. 죄인의 죄를 따라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용서와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성령의 가락지를 끼워주고 하나님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신발을 신겨주고 그리고 살찐 은혜의 송아지를 잡는 축복의 좋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모든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은 정의와 성결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극복되고 완성되었습니다. 완성된 율법은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와 사랑이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용서와 사랑이 있는 신앙을 갖게 도와주시옵소서.
덮어 주는 신앙을 갖게 도와주시옵소서. 남을 벗기는 일은 결코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덮어주는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랑 그 사랑 속에 우리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