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무엇이 참된 신앙인가

by 삶의언어 posted Nov 26, 2024 View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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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신앙성숙
예배드린 날 2013-03-03
오늘의 성구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s6GrmPUuP4A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사랑 없는 기독교는 아무 쓸데 없는 무용지물
독생자 주신 하나님과 십자가 지신 예수님 사랑
용서와 사랑 실천하면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 누려


 무엇이 거짓없는 참된 신앙일까요? 오래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아무리 좋은 행위와 의식을 가졌어도 훌륭한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열심히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교회 출석하고, 성실히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실상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참된 신앙인이 아닌 낙제생인 경우가 많습니다.

 

 1. 거짓된 신앙

 무엇이 거짓된 신앙일까요? 성경은 무엇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외형적으로 아무리 훌륭해도 거짓된 신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탁월하게 말을 잘하고 유창하게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잘하고 천사처럼 하늘의 언어를 말한다고 해도 그 생활 속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고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능력과 지식이 탁월한 사람도 그 삶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가진 것들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또한 구제와 헌신이 눈부셔도 사랑이 아닌 다른 동기로 하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4장 8절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가 좋은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아무 쓸데가 없는 무용지물입니다. 우리나라에 5만 여개의 교회가 있다고 할지라도 온전히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2. 십자가와 사랑

 기독교 신앙의 가장 확실한 근거와 가치는 십자가와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언제나 십자가에서 출발합니다. 그 이유는 의식과 제도와 종교가 아닌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인간된 우리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불가능하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금지옥엽인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입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믿음과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 믿음과 순종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를 지셨고, 그것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한다는 보증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기록하였고,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모시고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옛사람이 청산된 것을 상상하고 꿈꾸고 바라보고 믿으며, 입술로 “나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사람이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죽음이 내 죽음, 예수 부활이 내 부활, 예수 천국이 내 천국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와 예수님이 일치되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은 사랑 없이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신앙도 의미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이 신앙의 제일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로 18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기록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종교적인 신앙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가 없는 신앙


 마귀는 우리에게 와서 “예수 잘 믿고 열심히 교회 나가라. 십일조도 드리고 헌신해라. 그러나 십자가는 질 필요 없다. 십자가는 예수가 짊어졌으니 네가 질 것은 없다”라고 십자가가 없는 사랑으로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신앙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에 서있는 파멸의 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꽉 들어차서 세상에서 ‘나는 너보다 낫다’는 오만하고 무엇이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려고 하고 욕심에 서서 인생을 살면 십자가 없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을 죽여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자기희생의 십자가 없이 자기중심으로 신앙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하나님을 이용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은 모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힘으로 생수의 우물을 판다고 하는데 아무리 파봤자 그곳에서는 물이 머물지 못하고 터져 나가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는 인간의 수고는 결과에는 다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내어 맡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므로 믿고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므로 십자가 없는 신앙은 정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자기에 대한 성찰과 회개가 없고 이웃에 대한 비평과 판단만 있는 것은 십자가 없는 신앙의 전형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6장 37절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기록하였으며, 에베소서 4장 31절로 32절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기록합니다.

 교회에 다녀도 가장 위험한 신앙은 모든 것을 율법으로 판단하는 신앙입니다. 율법을 사람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고 율법을 우상화하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인데,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과 지도자들이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보다도 율법이 귀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 회개하고 깨어진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좋은 일은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은 주님께서 결국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부드럽고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스스로 깨어지신 예수님을 따라 깨어져야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4. 율법이냐 사랑의 실천이냐?

 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 30절에서 37절에 보면,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가지고서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상에 마귀에게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가버렸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보존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시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제사장은 율법만 지키면 되었지 사람이야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 레위인 한 사람이 총총 걸음으로 지나가다가 피투성이 되어 죽어가는 사람보고 똑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짐승을 잡고 성소의 물두멍에 물을 채우고 성전을 관리하고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의식만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를 지나던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없고 종교의식도 없지만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주막집에 맡기며 자신의 돈까지 털어내었습니다. 그렇게 베풀고 떠나면서도 “더 비용이 들면 내가 돌아오면서 갚아 주겠다”라고 말하며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율법과 의식을 지키고 행하지만 사랑을 버린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율법도 의식도 행하지 않지만 사랑을 베푼 이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고 누가 더 하나님께 칭찬 듣는 참되고 좋은 이웃입니까? 그렇습니다. 율법과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사랑을 베푼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이요 참되고 좋은 이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율법과 의식의 종교는 있고 하나님과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많이 볼 때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있지 사람을 평판하고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단호하게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모든 것을 해석해야지 사람을 가치 없이 여기고 종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성전에 가보니 병든 자가 있어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러자 그자에 있던 제사장, 레위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 등과 같은 이들이 “거룩한 안식일에 율법에는 아무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도대체 왜 안식일날 병을 고치느냐?”고 수근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답답한 사람들아 안식일 날 저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쳐준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알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물론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율법을 해석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이 되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그 자체로 해석하면 무서운 살인검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아버지가 두 아들을 키웠는데 둘째가 내 인생 내가 살겠다고 상속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상속을 아버지께로부터 탈취하여 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완전히 거지가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생각하기를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족한 종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렇게 하자. 아버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다시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아주소서’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뛰어 나가 그 목을 얼싸 안고 울며,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아들된 증거로 삼고 신발도 신기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내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다”고 말하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먹고 즐기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늘 아버지 곁에 있던 탕자의 형이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그 소식을 듣고서는 “아버지의 가산을 창기와 붙어먹으며 다 탕진해 버린 자식이 집에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저를 환영했으니 나는 이런 집에 안들어가겠다”고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회개하고 돌아오자 끌어안았는데, 형은 오직 율법으로 동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큰 아들에게는 율법이 동생보다 높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달래 보아도 그 아들은 끝내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잔치에도 참여 안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오면 율법주의자들이 되어 “술 먹고 도박하고 방탕하던 놈이 다 교회 나와 있으니 이런 교회에 나는 안온다. 나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으니 나 같은 사람있는 곳으로 가겠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은 지옥에 가기 쉽습니다. 천국은 회개한 죄인들이 올라가는 곳이지, 스스로 의인된 사람이 올라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앞에서는 눈물로 회개하며 완전히 깨어진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사마리아인에게는 율법과 의식이 없었지만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준 그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도 없이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간 그 사람들은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되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그 가운데 모시고 지켜야 올바른 율법이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소용이 없습니다.

 미국의 1963년 인종차별 철폐 시위대의 행진이 진압봉을 든 수많은 경찰들과 경찰견, 그리고 물을 뿜어내는 소화 호스에 맞닥뜨렸을 때, 그 선두에 있던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우리 집안에 폭탄을 던지시오. 그래도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이오”라고 외쳤습니다. 특히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나오면서 남긴 말은 유명합니다. 그 말은 바로 “그래도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당부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계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랑하면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으로써 이웃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이웃의 잘못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 마땅합니다. 사람들을 율법으로 판단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죄가 드러나게 해서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 회개하고 보혈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우리를 죽이는데 사용되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여!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우리도 우리보다 못난 사람들을 율법적으로 비평하고 판단하지 말고 함께 기도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는 참된 신앙인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이 율법의 정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걸머진 그 사랑을 생각하게 하시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사랑만이 우리를 화목케 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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