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하나님의 명함"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면 먼저 서로 인사를 교환하고 명함을 나눕니다. 명함을 보면 그 분의 성함과 그 분의 직업과 사회적인 위치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 교제상 명함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명함은 원래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많이 사용했는데 이제는 미국이나 구라파 사람도 모두 다 이 명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함을 서로 교환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 가운데 보면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도 명함 일곱 개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곱 가지 명함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면서 하나님이 어떠한 이름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 이름을 통하여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일곱 가지 명함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23편에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보여주는 책이요, 시편 23편이 그렇게 영감에 차고 축복이 넘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하나님의 명함은 '여호와 로이'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23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시편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목자로 계시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 명함의 이름이 '여호와 로이' 즉 나는 너희의 목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목자가 되면 반드시 양을 돌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자든지 양을 돌보면 목자는 양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양은 반드시 목자를 신뢰해야 되고 목자를 따라가야 되고 목자에게 양털과 젖을 반드시 제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그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그리고 양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되므로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로 신뢰하고 절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의심을 가지고서 부정적이 되고 하나님을 따라가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우리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순종해서 따라가며 하나님께 헌신 봉사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양의 수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순종하여 십일조를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몸 드려 봉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양을 인도하여 주시고 당신의 양을 보호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양을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양육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안 믿는 사람하고 틀립니다. 우리는 모두 다 우리의 목자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양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명함을 내 놓으실 때 나는 '여호와 로이'다. 너희의 목자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순종하고 나의 시간과 물질과 봉사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남은 인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손잡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좋은 것으로 양육하시는 '여호와 로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하나님은 또 무슨 명함이 계시나요? 두 번째 하나님의 명함은 '여호와 이레'입니다. 바로 시편 성경에 기록한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하나님이 예비하여 주심으로 모자람이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에 기록한대로 나는 부족함이 없다. 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 즉 나를 위해서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면밀하게 예비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아직 부모의 뜻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예비해 놓은 줄 모르지만 부모는 마음속에 예비해 놓았다가 자식이 성장함에 따라서 부모가 계획한 것을 하나하나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를 신뢰하고 살면 되었지 일일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호와 이레' 즉 부족함이 없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 단계에서는 지성이 모자라므로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나타나셔서 예비하신 것으로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시므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문자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요, 우리를 위해서 낱낱이 예비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갈 때 좋은 일을 당할 때나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나 염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때그때 마다 우리를 위해서 밝히 하나님이 최선의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과 같이 살 동안에는 우리는 부족함이 없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시므로 역시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사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계시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명함을 주실까요? 세 번째 하나님의 명함은 '여호와 샬롬'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들의 평안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시편에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셔서 평안을 갖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해서 평안을 갖게 하는 '여호와 샬롬'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양 무리를 푸른 초장에 갖다 놓으면 양무리는 뒹굴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풀을 뜯어먹으므로 배고픔이 없이 만족하게 살이 찔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는 것은 생활에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고 근심하며 불안과 초조가운데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생활가운데 평안을 주셔서 샬롬이 되시므로 우리 가정을 푸른 초장으로 만드시고 우리 직장을 푸른 초장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삶을 푸른 초장으로 만들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막으로 인도하여 눕히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불모지에 눕히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 북극의 툰트라 지역에 눕히겠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푸른 초장에 우리를 누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삶의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마음에 깊은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 생활의 평안뿐 아니라 여기에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쉴만한 물가는 마음의 갈급함을 채워주는 마음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맘속에는 한없는 하나님의 '여호와 샬롬' 하나님의 평화가 깃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행복의 첫째 조건은 돈도 아닙니다. 지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행복의 가장 첫째 조건은 마음의 평안인 것입니다. 평안하게 잠자리에 들어가고 평안하게 아침에 일어날 수 있고 비록 죽을 먹고살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있으면 얼굴에 찬란한 빛이 나고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수성찬을 먹고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불안하면 얼굴에 빛이 없고 사색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에 평안이 되시고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되시는 '여호와 샬롬'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샬롬'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이여 제게 하나님의 평안으로 채우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푸른 초장에 누이며 너를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넷째, 하나님의 명함은 무엇일까요? 네 번째 또 하나님이 명함을 내놓으시는데 '여호와 라파'인 것입니다. '여호와 라파'는 무엇일까요? 나는 너의 병을 치료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료자라 그러면 성경 시편에 그런 말이 있을까요? 시편은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소생시킨다는 말은 살리고 치료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내 영혼이 병들고 내 영혼이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죽은 영혼을 살려 주시고 병든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마음이 소생되면 육체도 고침을 받습니다. "마음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마음이 상하면 누가 저를 일으키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이시라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육체를 치료하시고 생활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도적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로마서 8장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 다른 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 영은 바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신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리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칠십에 죽든 팔십에 죽든 우리는 한번 죽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죽을 몸도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자꾸 살려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젊었을 때에만 생기발랄한 것이 아니라 백수가 되어도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생기를 넣어주고 우리에게 살리는 역사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라파' 여호와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다른 점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 계시므로 성령으로 여러분의 생명은 끊임없이 소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여러분은 늘 생기발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있는 두사람 이상에게 '성령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한번 말씀하십시오. 예수 믿고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언제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십시오. 여러분 속에서 생명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하나님의 명함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물으면 하나님은 또 명함을 내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명함에는 '여호와 찌드게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시편 23편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되셔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이 세상에 살 동안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죄악의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죄악의 누더기 옷을 입고서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 멸망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 힘으로 죄악의 누더기 옷을 빨래할 수도 없고 벗어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하나님은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의 모든 죄악의 누더기 옷을 다 걷어서 자기가 걸머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그 죄악을 다 청산해 버리시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에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 찌드게누'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니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냐? 우리처럼 의로우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떻게 죄 많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서 법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평생에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부끄럼 없게 서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귀가 참소하지 못하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의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므로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들고 죄를 지으면 가슴이 아프게 만들고 불의한 일을 당하면 통곡하고 회개하게 만들어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여호와 찌두게누'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는 바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하는 이 시편에 하나님의 명함이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하나님의 명함은 이로써 끝이 났습니까? 하나님 왈 '아니다 아직 나는 너에게 줄 명함이 있다' 여섯 번째 명함을 꺼내 주십니다.
여섯번째, 하나님의 명함은 '여호와 삼마'인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바로 시편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삶의 시련과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극심한 시련이 다가오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다가오고 모든 사람들은 다 나를 떠날지라도 '여호와 삼마'는 나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 그 시련의 골짜기에도 하나님은 나와 같이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시련을 당하면 심신에 해를 받지만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사람은 해를 받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승리도 패배도 질병도 건강도 합쳐서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위대한 능력으로 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셉이 그 형들에게 말하기를 형들은 나를 해롭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 내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호와는 우리와 같이 계시는 여호와 삼마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지팡이로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막대기로서 원수를 쳐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지팡이로 인도하시고 막대기로 보호하시고 하나님은 전능의 능력으로 해를 선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넘어지나 또 일어나고 망하는 것 같으나 다시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을 찬미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안위를 빼앗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 이쯤 되었으면 이제 되었겠지요. 또 다시 우리에게 주실 명함이 있습니까? 아 시편 23편 읽어보아라. 아직 끝이 안 났다. 그리고 일곱 번째 하나님이 명함을 내 주십니다.
그 일곱번째, 하나님의 명함은 '여호와 닛시'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승리의 깃발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을 보면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 닛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 다가오면 승리의 깃발을 세우시고 원수 앞에서 진수성찬을 차려서 먹게 하시고 우리 머리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서 우리를 형통하게 높여 주시므로 말미암아 승리의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원수가 오지 아니하면 '여호와 닛시'께서 오셔서 깃발을 날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원수에 부딪힐 때 바로 우리가 발전할 때인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가 더욱 진수성찬을 먹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우리가 성하게 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편안한 생활보다도 오히려 원수의 공격을 받고 원수에게 압박을 당할 때 그때가 더 위대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왜? 원수가 오면 '여호와 닛시'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승리의 깃발을 세워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승리하면 승리할수록 우리가 발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평안할 때는 평안해서 '여호와 샬롬'으로 좋고 전쟁의 시기에 원수가 다가오면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닛시'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싸워 주시므로 하나님 안에서 승리의 깃발을 날리고 그 밑에서 승리의 진수성찬을 먹고 승리의 잔이 넘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이 시편 23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어떤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지금부터 여러분께서 시편 23편을 읽으실 때 막연하게 읽지 마시고 시편 23편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이름을 여기에 대표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시편을 읽으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감격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가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살면 세월이 흘러간 다음 뒤를 돌아다 볼 때 험한 세월을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일일이 그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 때는 배고프고 서럽고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면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뒤를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요 하나님의 인자하신 손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제가 폐병 걸려서 17살에 쓰러졌습니다. 그때는 나에게 너무나 서럽고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그로써 내 모든 인생은 다 끝장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할 수 없는 주야의 고통은 형언할 수가 없고 그리고 학교는 그만 두었고 친구들은 다 앞으로 발전하고 나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영혼 속에 겪은 말할 수 없는 그 번뇌와 고통은 도저히 그것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오늘 뒤를 돌아보니 제 생애 속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제가 폐병으로 거꾸러진 그 때였습니다. 제가 폐병에 안 걸렸으면 예수 믿었을 리도 없고 목사가 될 리도 없고 그리고 우리 식구가 다 구원받아서 천국백성이 될 리도 만무한 것입니다. 이제 그때는 괴로워도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한 그 생애는 안된 것이 된 것이요 슬픔이 기쁨이요 절망이 오히려 소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현실의 삶이 괴롭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이상 현실의 낙심되고 고통스러운 것이 나중에 지나고 보면 여러분에게 최대의 유익이 되고 선이 되고 하나님의 자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미래를 바라보면 어떠합니까? 미래는 하나님의 일곱 가지 이름이 우리를 받들어 준 생애의 결과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의 앞날에는 천국에 하나님의 집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나 죽는 것이 없는 세계 속에 극락의 집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라오고 앞을 바라보면 나의 집이 이미 여호와의 집에서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살면 결과적으로 거대한 영광이 우리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스러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보다 이 세상에 복된 자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시편 23편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그 명함을 통해서 소개해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막연하게 하나님을 찾지 말고 하나님의 명함을 하나 하나 들여다보고 나의 처지에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가를 깨달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시편 23편이 펼쳐진 책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다 계시되게 도와주시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매일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