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죽음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일

by 삶의언어 posted Oct 05, 2024 Views 24 Replies 0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ESCClose

Larger Font Smaller Font Viewer Up Down Go comment Print
Extra Form
오늘의 주제 하나님/하나님 나라
예배드린 날 2014-10-05
오늘의 성구 누가복음 16장 19절로 3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g1kDCGm4lqc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중략)…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6장 19∼31절


유한한 인생,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아야
낙원에는 영원한 기쁨, 음부에는 영원한 고통 기다려 
오중복음·삼중축복 주시는 주님만이 인생의 해답

 이 세상에 모든 만물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성경은 말하며, 죽음이 다가올 때 그것은 구경거리가 아닌 나만의 사건이 되고, 혼자 걸어가는 골짜기지 결코 누군가와 손잡고 함께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성경의 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다음 세상의 실존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 현실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

 우리의 하루하루가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 19∼2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오늘 말씀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한 부자라고만 되어있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고, 권세도 있고 돈도 있는 사람이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매일 좋은 음식과 술로 인생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니 먹고 마시며 인생이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것 같았던 그 인생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유한한 인생에 대해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했습니다. 호화롭고 즐거운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눈깜짝할 사이에 시들어버릴 들의 풀과 같고, 금방 떨어져 버릴 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부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전혀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부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한 부자라고만 한 것입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의 삶은 대문 밖에 거적을 깔고 누더기를 걸치고 누워있는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주님을 알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매일같이 들으셨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주님을 예배한 흔적이 그에게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이름을 밝혀 “내가 너의 이름을 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벌 힘이 없고, 살 집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몸에 병이 들었어도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개들이 그 상처를 핥아 주는 절망적인 삶이었고, 부자의 상에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자는 세상에 가진 것이 풍부해 누리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를 알지 못하셨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는 가진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3

 

 2. 죽음 이편의 세계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육이 있습니다. 영적인 나는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요 4:24)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고, 대회가 단절되니 영적인 세계가 깜깜하게 되었습니다.

 혼적인 나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면만을 강조합니다. 혼적 세계는 이성과 과학적 사고를 깨닫는 세계를 말하는데,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세계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혼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신화를 절대로 믿지 않으며, 성경은 신화에 불과하고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도 없고 하나님도 계시지 않고, 물질 밖에 없으며, 인간이 전부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육적인 나는 감각적이고 본능적이고 탐욕적인 것, 쾌락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즉 육신적인 모든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 육체를 중심으로 사느냐, 혼을 중심으로 사느냐, 영을 중심으로 사느냐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는 혼적 자아와 육적 자아에 의해 삶이 점령당해 살았습니다. 영의 세계는 관심도 없었고, 또 알 수도 없었습니다. 혼적 자아와 육적 자아가 죽음으로 사라질 때 그것이 존재의 끝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이었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만을 찾고 모셨기에 영이 살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은 거지라고 인정해주지도 않고, 사랑해주지 않았으며, 친구도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사로”라는 그 이름을 기억하셨습니다. 아무튼 결국 이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죽음 저편의 세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부자도 죽고,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혼적 세계와 육체적인 세계를 벗어버리고, 내 영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혼과 육체의 세계를 벗어버리자 그 영적 자아가 천사들에게 에스코트를 받아서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눅 16:22) 낙원은 믿음으로만 가는 곳이며, 오늘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오직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만이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낙원이 아닌 우주의 쓰레기 처리장인 음부의 불꽃 가운데에 떨어졌습니다. 부자가 음부에 떨어져보니 그 고통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며 쳐다보니 낙원에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있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거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서 자신의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 요청합니다.(눅 16:22∼24) 얼마나 괴롭기에 물한방울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구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눅 16:25∼26)

 낙원하고 음부 사이에는 건너왔다가 건너갈 수는 없는 굉장한 구렁텅이가 있어 사람의 힘으로는 건너가지 못하고 건너 올수도 없습니다. 그 뜨거운 고통의 불꽃 가운데서 낙원에 있는 나사로를 보니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그제서야 기도를 합니다. 세상에 살 때 기도 한번 안하던 그가 음부에 내려가서 기도를 한다고 응답되겠습니까?

 음부에 있는 부자는 또 다른 요청을 합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7∼31) 오늘 말씀에 모세와 선지자는 성경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식을 접하려면 성경을 봐야 합니다. 성경이 주는 말씀을 믿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이 가서 이야기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보배이며, 성경을 통해 복음과 하늘나라에 대한 소식들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 어느 것 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만나는 것이 제일 올바른 만남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 죄를 대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보혈로써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성결을 얻으며, 마음의 병이나 육체의 병이 낫게 됩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얻게 됩니다. 부활, 영생, 천국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가서 이야기해도 믿지 않는다’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4. 4차원의 세계


 이 사실은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과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 잘 드러납니다. 니고데모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와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그는 율법주의자고 바리새인이었으나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신기한 능력을 보고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혼의 사람, 육의 사람으로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혼의 사람, 육의 사람은 3차원 세계의 사람이지만 영의 사람은 4차원 즉 성령의 세계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즉, 영의 사람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하늘나라의 일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육으로 태어나서 혼과 육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이 육과 혼을 다스리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혼과 육을 다스려가야 하는 영이 타락하여 죽어버리니 사람이 완전히 혼돈되고 부패해져서 혼과 육이 서로 경쟁하며 나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의 자아가 진정한 우리의 자아요, 그 영은 영원하다는 사실입니다. 혼과 육은 물질이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우리의 영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든지 지옥에서 영원히 살든지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사람이 죄를 지어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되면 영이 살아나 새사람이 되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보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같이 계신 이’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떠나가시고 난 다음에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과 똑같이 제자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영적 세계는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성령이 내안에 들어와서 내 영을 점령하고 하늘나라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속에는 지금 성령이 들어와 계시고 4차원의 영으로써 3차원의 혼과 육을 다스리시며, 우리와 함께 손잡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장 13∼16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망과 불평 속에 불뱀에 물려 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보게 하심으로 살리셨던 구약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세상에서 마귀 뱀에 물려서 독이 올라 다 죽어가지만 내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높이 올라갈 것이니 나를 쳐다보고 믿기만 하면 죄의 독이 다 사라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바라보고 산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 더러운 독이 다 해소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려 주신 보혈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은혜가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나가면 창조적인 역사, 기적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다가 죽으면 천국 대합실인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말하는데, 신약에서 이 낙원의 표현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우편 강도가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주님이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셨을 때, 또 사도요한이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말할 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고 하신 말씀에 나타납니다. 낙원과는 별도로 천국은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재림 이후에 주어질 아버지 집, 더 좋은 집을 말합니다. 아름다운 아버지 집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있을 곳을 예비해 놓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은 아버지 집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것이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나라인데 우리가 낙원에 있다가 주님이 강림하시고 부활하시고 난 후에 함께 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음부에 떨어진 영혼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지옥의 대합실인 음부에 머물다가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부자는 지금도 그 음부에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의 심판이 있은 후 지옥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인간의 머리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낙원으로 가야지 음부에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음부에 내려가고 나면 다시는 낙원으로도 천국으로도 올라올 수 없습니다. 음부와 지옥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8∼49)

 우리는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하며 살아가나? 또 어디로 가는가?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도 대답이 없지만 예수를 믿고 나면 그 해답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그 후손으로 나를 낳아 주어서 이 세상에 있으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고, 죽음 이후엔 천국 대합실인 낙원에서 기다렸다가 나중에 영원히 거할 아버지 집 천국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해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부모에게서 태어난 장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인생의 그 끝에는 ‘흙으로 변하면 없어지고 말겠지’라고 합니다. 엉터리 같은 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는 정체성이 뚜렷합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아담과 하와의 품에서 태어나서 타락한 고로 그 타락한 유전을 받아서 이 땅에서 고생을 하고 살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며, 그 덤으로 이 땅에 살 동안에도 예수님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과 은혜를 받아 살다가 주님이 오라고 부르시는 날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주실 분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 밖에 없는데 이 놀라운 사실을 예수님 안에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통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용서하는 복음, 거룩함을 얻는 복음, 병고침 받는 복음, 저주에서 해방되는 복음, 천국 영생 복락을 얻는 오중복음을 십자가에서 받아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삼중축복, 전인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꿈에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입술로 시인하면 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나의 생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 섬기고 그 은총을 누리고 살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모두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약속하시며, 이땅에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놀라운 은혜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늘나라 바라보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