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린도후서 5장 7절
아브라함이 보여준 행동하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
믿음의 담대한 선언을 통해 승리해야
믿음이란 우리 육체의 오감을 초월한 것이기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낭패를 당하기 쉽습니다. 아담이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선악과를 보았기 때문에 마귀에게 현혹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했으면 되었는데 선악과를 바라보고 보이는대로 행하였기 때문에 마귀의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고, 감각으로 느끼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를 이길수 있었던 것입니다.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 속에서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 행하여서 시행착오도 겪게 되지만 결국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디로 갈지 방향도 모르는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4절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믿음에는 시험이 다가옵니다. 쇠를 불에 넣어봐야 그 단단함의 정도를 알 수 있듯이 믿음의 진실성은 시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가난안땅에 들어왔을때 그 땅에 큰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모든 나무와 풀들이 다 마르고 우물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짐승들이 다 굶어죽고 종들도 뿔뿔이 도망치고 따라온 일가친척들도 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 곳을 보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말씀을 믿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보이는 황폐한 환경을 직시하고 살길을 찾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아브람은 안타깝게도 믿음을 놓쳐버리고 살기좋은 애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애굽에 내려가서 겪은 수치와 곤욕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수치와 곤욕을 당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아야 되는데, 믿음을 저버리고 보는 것으로 행하면 환경과 운명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으면 아브람은 애굽에 내려가서 망했을 것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광산에서 일을 하던 중, 등불을 들고 땅속깊이 들어가다가 그만 등불이 꺼졌습니다. 갱도 깊숙이 들어가던 중 등불이 꺼졌으니 어둠 가운데 어디로 나가야될지를 모릅니다. 당황했습니다. 이젠 죽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마음속에 지혜가 생겨났습니다. ‘갱도에는 반드시 화차가 들락날락하는 철길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길을 찾아 더듬어 보니 갱도에 나있는 철길이 발에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철길을 더듬어 따라나오니 갱도 밖으로 나올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그는 환한 천지를 다시 볼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캄캄한 동굴속에 들어갔을지라도 우리가 인도하는 철길인 말씀을 따라서 믿고 나가면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가 승리의 길로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철길을 저버리고 환경을 바라보면 길을 잃어 버리고 낭패에 빠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보는 것을 따라 갔다가 큰 낭패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회개하고 돌이키자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은과 금이 풍부하고 종들도 많고 짐승도 많아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카 롯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서로의 갈길을 가게 됩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선언합니다. “조카야 네가 동이라면 내가 서로 가고 네가 남이라면 내가 북으로 갈 것이다” 그때 조카 롯이 요단지역을 바라보니 온땅에 물이 넉넉하고 굉장히 좋은 땅이었습니다. 조카 롯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옮겨가고 메마른 땅에 아브람은 혼자 남았습니다. 그는 믿음을 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땅으로 갈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조카에게 선취권을 주고 조카가 떠나고 난 다음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믿음으로 머물러 있으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조카 롯은 보는 것으로 행했다가 나중에 소돔 고모라 성에 전쟁이 일어나서 가산을 다 잃어 버리고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적인 신세까지 되었습니다. 아브람도 이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통과하여서 복을 받는 과정을 보여줌으로 연약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10년이 지나서 85세때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내어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려 보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 5절로 6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로 22절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눈으로 보아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상상하려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할수 없으나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와 같은 예화가 아브라함의 생애에 큰 믿음의 시험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그 믿음은 입증됩니다. 창세기 22장에는 그 믿음의 행동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고 담대히 말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단을 만들고 아들을 묶어 장작 위에 얹어놓은채 목을 베려고 할 때,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은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독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타협하지 아니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드리려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야 말로 믿음의 표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믿음으로 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과의 관계, 즉 아버지와 자녀관계가 확실히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위해 먼저 예수를 구주로 모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믿을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간도 서로 한 부모 밑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애하고 사랑할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서로 사랑하게 되면 서로 믿을수 있게 됩니다. 인생이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로 믿을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때에 하나님도 우리를 믿으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아버지와 우리 가운데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서로 믿을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안에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좋은 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사랑의 관계 속에는 섬김과 순종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순종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종하고 이웃과 서로 믿으면 서로 말을 들어주고 순종하는 관계가 이루어져 믿음이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순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임금이 되자 제일 먼저 아말렉을 징벌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르비딤에서 아말렉이 공격하여 이스라엘이 전멸당할뻔 당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아말렉을 쳐서 짐승과 사람을 다 멸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나갔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아말렉을 쳐서 아말렉 백성들을 진멸했으나 왕은 살려서 끌고 오고 살찐 짐승들을 모조리 다 끌고 왔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아각 왕을 끌고 온 것은 자기가 전승을 했다는 자랑을 하기 위한 것이고 살찐 짐승들을 끌고 온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끌고 왔다고 변명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사무엘이 와서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사무엘이 이르되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순종은 사랑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울은 버림을 당합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후 더욱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목회자이며 교수인 퍼거슨은 말하기를 “우리는 오직 순종 가운데서만 하나님 뜻의 가장 위대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고 독일의 본 훼퍼 목사는 “믿는 자들만이 순종할 것이며 순종하는 자들만이 믿게 될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시인이었던 맥도날드는 “순종은 모든 문의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고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않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맺어질뿐 아니라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능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위대한 부흥사였던 무디 선생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믿음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믿음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을 읽는 순간 지금까지 성경은 덮어 놓고 믿음을 위해 기도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성경을 공부하는 동안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오자 믿음이 부쩍 자라나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을 알아야 믿을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고 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난 다음에, 우리가 그 믿음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됩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자동차에 항법장치인 네비게이션을 달고 운행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오래전부터 네비게이션을 차에 달아 놓고 인공위성을 통해 길을 안내받는 생활의 편의를 누려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낯선 도시에 가더라도 차에 네비게이션만 달아 놓으면 그 도시의 어떤 장소이든지 찾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편리한 문명의 이기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네비게이션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됩니다. 성령은 우리속에 와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눈이 되어 주시고 귀가 되어 주시고 깨닫는 마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위에 섰으면 그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갈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과 감각의 대결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부딪히게 되는 것이 감각과의 대결입니다. 마귀는 감각을 통해서 이성과 감정을 강조하며 보고 들리는 것에 현혹되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믿음과 감각의 대결이 있습니다. 마귀는 감각의 세계를 통하여 엄청난 공격을 퍼붓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삶은 의심과 불신앙의 적과 엄청난 마음의 투쟁을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그 위에 서는 것입니다. 자유케 하시는 진리의 말씀위에 확고히 서서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고 온갖 방해가 들어와 나를 흔들어도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과,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한 말씀에 비추어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다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말씀속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속 깊숙이 받아 들여야 됩니다. 말씀을 그냥 눈으로 보고 머릿속에 생각하지 말고 마음속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이해하려 합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말씀이 내 안에 일치가 되어야 되는 것인데 현대인들은 그렇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속에 깊은 묵상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깊이 받아들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스코필드라는 성경 주해를 달은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술주정뱅이었습니다. 그가 술을 끊겠다고 결심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다음에도 술집 앞을 지나갈 때면 그 유혹에 쉽게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을 받으니 안되겠다싶어 술집이 없는 곳으로 돌아서 다니므로 술을 피할수 있었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을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죽여 각을 떠서 태워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을 내리고 좌우로 살피지 아니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알고 가슴속에 깊이 받아 들였으면 그 다음부터 믿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것이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으며,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였던,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키고 결단했듯이 우리에게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선언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언은 마귀의 궤계를 막아내는 힘입니다. 성경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시인하고 선언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도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알고 말씀을 받아 들이고 말씀을 믿기로 결단내렸으면 늘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던 미국의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3월에 연습중 떨어져서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코치는 그녀의 부상을 보고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며 출전불가를 선언했으나 윌킨스는 하루에 수십번씩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깊이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그는 그 말씀을 믿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사들은 다이빙을 못한다고 했고, 코치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는 빌립보서 4장 13절을 계속해서 매일같이 묵상하며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다시 올림픽에 출전해서 다이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했습니다. 믿음은 상식을 초월하고 세상의 법칙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선언하고 보는 것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서 우리의 삶속에 기사와 이적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선한 일을 넘치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으로 행하면 낭패와 실망을 당할 때가 너무나 많고 마귀의 올무와 시험에 빠져들어갑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고 말씀과 더불어 살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승리하고 성공적인 한해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