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인물

방효원 선교사

by 삶의언어 posted Jan 12, 2024 Views 7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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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지인 선교 위해 한평생 헌신
한국인이 세운 첫 해외 신학교 ‘라이양성경학교’설립
아들 방지일 목사, 2대에 걸쳐 산둥성 선교

 

중국 선교하면 허드슨 테일러가 떠오른다. 그런데 한국인 중에도 중국 선교를 위해 한평생 헌신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방효원 선교사이다.

188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방효원 선교사는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자랐다. 방효원 선교사는 12세 되던 해, 방씨 가문의 장손이었던 아버지 방만준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나 모진 핍박을 받으며 타향살이를 하게 됐다.

방효원 선교사는 만 20세가 된 1906년 평북 선천으로 거주지를 옮겨 기독교 중등 사립학교인 선천 신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신성학교에서 양전백 목사와 위대모 선교사에게 신앙 훈련을 받았고 이후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진학해 마포삼열,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신학교를 졸업한 방 선교사는 평북 철산군에 위치한 영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박태로 선교사와 시찰을 다녀온 후 선교사로 자원했다.

1917년 가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방효원 선교사는 산둥성 내양에 부임해 남관교회를 설립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중국어 습득에 열을 올렸다. 현지에서 전도와 심방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선행되어야했기 때문이다. 방 선교사는 “화인(華人)을 얻으려면 화인(華人)이 되어야만 한다”며 “중국어를 구사하고 현지 의상을 입고 현지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라이양에 거주하면서 남관교회와 지방교회를 관리하고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또한 전도대를 결성해 감옥전도와 걸인구제에도 매진했다.

그는 홍승한·박상순·이대영·주현측 선교사와 동역하며 30여 개의 교회를 세워 내양노회를 조직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내양노회에 속한 회원교회 즉 현지 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교육영역에 주력했다.

 방 선교사는 현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기 위해 성경공부 집회인 제직사경회를 시작했고 1923년 1월 1일에는 교회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라이양성경학교’를 설립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한국인 최초로 외국에 신학교를 설립한 영예를 얻게 됐다. 그의 삶을 본 중국 성도들은 방 선교사를 존경했고 영적 아버지로 삼았다. 심지어 반기독교운동자들조차 그를 칭찬하며 도움을 주었다.

1935년 산둥에서의 사역을 끝마치고 귀국한 방효원 선교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방지일 목사가 1937년 산둥성 선교사로 부임했다. 방효원·방지일 부자는 2대에 걸쳐 중국 산둥성 복음화를 위해 38년 동안 헌신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1936년 상하이 조선교회에 재파송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다 1945년 국내에 복귀해 목회활동을 이어갔다. 6·25전쟁으로 1953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방 선교사는 지병이 발병해 항년 6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중국 산둥 선교에 힘쓴 방효원·방지일 선교사는 한국과 중국의 크리스천, 선교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