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인물

김윤식 선교사

by 삶의언어 posted Jan 14, 2024 Views 7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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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파송된 의료 선교사

현지인 및 선교사 가족 건강 돌보며 자비량 선교
관청에 의료 지원하며 수감자 전도에도 앞장서

 

김윤식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중국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는 의료선교의 초시였던 알렌 선교사처럼 서양의술을 활용해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1891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전문의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학교 공부를 마친 후 유학을 계획했지만 당시 대구제일교회 홍승한 목사와 아버지의 권유로 중국 의료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됐다.

1918년 대한민국 개신교는 의사로 활동하던 그를 중국 라이양으로 파송했다. 김윤식 선교사의 파송은 알렌 선교사가 내한한지 34년 만에 개신교 의료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7세의 나이로 중국 라이양에 도착한 김윤식 선교사는 제일 먼저 선교사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김 선교사는 질병에 대처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던 선교사와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며 그들의 선교활동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현지인도 함께 진료했고 그들에게 신앙서적을 나눠주며 전도 활동에도 매진했다. 병약했던 방효원 선교사의 아내 계은승 사모는 김 선교사로부터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의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에 그를 목사나 선교사처럼 지원하지 않았다. 김윤식 선교사는 오직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선교를 자비량으로 해결했다.

선교지에 도착한 그해 12월, 개인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계림의원’을 개업했다. 계림의원은 당시 라이양에서 서양의학을 시술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서양선교사 가족들은 물론 현지 교회와 학교 구성원 모두 이 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의료선교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김윤식 선교사는 많은 헌신과 희생을 감내해야했다. 활동 초기에는 중국인들에게 아편장사로 오인 받았고 선교지에서 활동한지 4년 만에 자녀를 둘씩이나 천국으로 보내야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라이양에서 청도로 이주한 김윤식 선교사는 ‘중앙의원’을 개원해 의료선교를 이어갔다. 그는 서양인과 현지인 구분 없이 모두에게 친절히 진료하며 지역에서 큰 존경을 받았고 관청에서도 촉탁을 받아 수감자들의 치료와 위생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감옥 전도 사업’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중국 땅을 밟은 후 거둔 의료선교의 결실이었다.

김 선교사는 1940년대 들어서 광복군 군자금에 관계된 것이 드러나 체포됐다. 이후 영구 출국을 당하면서 그는 더 이상 의료선교를 할 수 없게 됐다. 선교지에서는 의료선교사로, 고국에서는 장로이자 의사로 활동한 그는 위암으로 투병하다 1958년 8월 향년 6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