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인물

에릭 리들

by 삶의언어 posted Jan 15, 2024 Views 6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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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 통해 그의 일생 알려져
올림픽 금메달 영광 버리고 선교사 결단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1924년 8회 파리올림픽 육상 100m 금메달 후보였던 영국의 한 선수가 한 말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인 그의 이름은 에릭 리들이다.

에릭은 아버지 제임스 리들 선교사의 아들로 190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가 됐을 때 처음으로 참가한 교내 육상대회에서 100m 1등, 200m 2등을 하며 육상선수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에든버러 대학으로 진학해 교내는 물론 영국이 자랑하는 최우수 육상선수가 됐고 마침내 올림픽 단거리 육상선수로 발탁됐다.

에릭은 올림픽 육상 100m 경기가 평일이 아닌 주일에 열려 경기를 포기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라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에릭은 평일에 열린 200m와 400m 경기에 출전해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과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400m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해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힘차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올림픽 이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명성이 높아갈 때쯤 에릭 리들은 사람들에게 중국 선교사가 될 것을 선포했다. 이전부터 아버지와 형을 이어 중국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에릭은 이듬해 23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에릭 선교사는 12년간 톈진 중영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후 7년 동안 자신이 태어난 샤오창 지역에서 농촌 사역을 펼쳤다. 그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유는 선교사로 활동하던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과 일본군의 침략으로 수많은 농촌 주민들이 전쟁의 희생양이 됐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에릭 선교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하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마을을 방문해 전도 집회를 열었다. 또한 외국인 선교 활동이 제한될 것을 예상하고 제자훈련과 교인양육 지침서 등을 직접 저술하며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기 위한 방안도 모색했다.

1939년 현지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던 에릭 선교사는 뜻하지 않게 중국에 억류됐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외국인들을 수용소에 억류했다.  

이때 에릭 리들은 1만 8000여 명의 서양인들이 모인 수용소를 제2의 사역지로 삼고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분쟁을 해결하는 대표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매진했다. 에릭은 1945년 2월 뇌출혈로 수용소에서 43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훗날 에릭 리들의 일생을 담은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가 제작돼, 이를 계기로 에릭 리들의 일생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