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인물

이기풍 선교사

by 삶의언어 posted Jan 16, 2024 Views 8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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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복음화에 헌신한 한국 최초의 선교사
13년간 제주 전 지역에 30개 교회 설립

 

이기풍 선교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7인 중 1명이자 첫 공식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1865년 11월 2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이기풍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6세 때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을 외웠고 12세에는 붓글씨로 백일장 장원에 뽑힐 정도로 특출났다.

이기풍 선교사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기풍 선교사는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에게 돌을 던져 턱을 크게 다치게 했는데 그가 훗날 스승인 된 모펫 선교사였다.

이기풍 선교사는 소안론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모펫 선교사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가 세운 조선 최초의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서경조, 길선주, 방기창, 한석진 등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1907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같은 날 동기인 길선주 목사의 집례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됐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다.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선교사는 조랑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그가 복음을 전할 때면 도민들은 그에게 굴욕을 주었고 집단 구타까지 행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의 선교 사역에 물꼬가 트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주도에 큰 홍수가 나서 주민들이 떠내려갈 때 이기풍 선교사가 물속으로 뛰어 들어 주민 5명을 구조한 것이다. 또한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며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민들에게 큰 신뢰를 얻게 됐고 그가 세운 제주 성안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 지역 복음화를 위해 순회 전도사역을 이어갔고 금성·조천·모슬포·한림·용수 등의 지역에 교회를 설립했다. 중간에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내륙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다시 돌아가 13년 동안(1909~1915, 1927~1932) 제주도에서 사역하며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제주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순천에서 사역하던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발하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됐다. 순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의 나이로 소천 받았다.

제주시 조천읍에는 제주도 복음화에 한 획을 그은 이기풍 선교사를 기리기 위한 '이기풍선교기념관'이 건립됐다. 현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운영이 중단되어 모든 자료는 제주 모슬포교회 '이기풍 기념관'으로 이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