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개화의 선각자, 일제시대 미주의 독립운동가, 건국 초기 민족의 지도자
1896년 ‘독립협회’ 설립 최초의 민영 일간지 ‘독립신문’ 발행
복음과 민족이라는 두 기둥 붙들고 구국 운동 앞장 서
“조선의 청년들이여, 그대들 인생의 최고 목적은 조국을 위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조국은 여러분이 정직하고 정의롭기를 기대한다”
1930년대 서재필이 조국의 청년들에게 쓴 글이다. 대한독립을 위해 한국과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서재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또 1896년 4월 7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발간 취지에 대해 서재필은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발간을 계획하였다”고 밝혔다. 또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됐다. 독립협회는 국민계몽 및 정치븡사회운동 단체로서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재필은 1864년(고종1년) 1월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7촌 당숙 서광하의 양자로 입적돼 양어머니 동생인 외숙 판서 김성근 밑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김성근과 친분이 있는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을 비롯해 초기 개화파 핵심인물들과 친분을 쌓았던 서재필은 19세 나이로 별시 문과에 급제한 양반 관료였다. 하지만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귀국 뒤에는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3일 만에 붕괴되면서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가족은 몰살됐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낯선 이국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때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워갔다. 또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바레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홀렌백을 만나 그의 후원으로 공부해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 전신인 컬럼비아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890년 한인 역사상 최초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서재필은 만 28세이던 1892년 의사가 돼 현지에서 활동했다. 1895년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면서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립협회 창설 후 국민계몽에 힘써온 서재필은 수구파 대신 등 반대파의 방해로 1898년 5월 14일 독립협회를 남겨둔 채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독립 운동의 열정은 누구도 막질 못해 서재필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미주 한인들 권익옹호에 나서는 등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19년 3븡1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와 선전활동을 나섰다.
같은 해 4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150여 명의 재미 한인대표, 미 상원의원과 시장 등 다수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자유대회(일명 제1차 한인대회)’를 개최해 이승만을 비롯한 재미 한인대표들과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면서 4월 13일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사비를 털어가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서재필은 복음과 민족이라는 두 기둥을 붙들고 구국운동 선봉에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광복 이후인 1947년 미군정장관의 초청으로 귀국해 미군정청고문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서재필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1994년에는 미국에 있던 서재필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2008년 5월 6일 미국 워싱턴시는 워싱턴총영사관 앞에 서재필의 동상을 건립하고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이 설립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