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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당연지사와 은혜

by 삶의언어 posted Sep 30, 2024 Views 3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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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은혜
예배드린 날 2007-12-23
오늘의 성구 누가복음 15장 11절로 24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aEnIXubaxp4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중략)…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누가복음 15장 11∼24절


우리 삶에 주어진 많은 것들
깨닫지 못할 때는 당연지사
깨닫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


 이번 서해안 원유유출 사고로 태안해안국립공원 생태계가 제 모습을 찾기까지는 적어도 20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바다 밑바닥에 사는 저서생물과 어패류 등의 생태계 파괴가 벌써 시작되어 어류 46종도 거의 사라진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환경부는 3년이 지나야 해조류, 갯지렁이와 바위에 붙어사는 생물이 복원되기 시작할 것이고 조개류는 5년 이상 지나야 회복 되고 적어도 10년은 지나야 모든 생물이 회복 단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밖에 근해 어업에도 타격을 주어 고등어 3대 어장 중 하나인 태안 앞바다는 조업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싸여 늘 풍부한 해산물을 얻을 수가 있었고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바다로 갔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저 자연이 주는 당연지사로 알았습니다. 이번에 가서 해안이 시커멓게 기름 끼로 물들고 돌들이 기름에 뒹굴어지고 새들이 죽고 해초가 기름에 뭉개지고 해조류들이 다 죽고 조개가 죽고 모든 것이 죽음으로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아∼ 청정해역은 당연지사가 아니었구나! 바다의 아름다운 물결, 바다가 주는 신선한 해산물은 당연지사가 아니었구나!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잘 가꾸고 보존해야 우리가 누릴 수 있구나!’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할 때는 당연지사로 생각하지만 깨닫고 보면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1. 탕자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보면 은혜를 모르는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에 살면서 의식주의 복된 삶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감사나 감격한 일이 없었습니다. 큰 농사를 짓고 거대한 저택에 자기 독방을 가지고 있고, 없는 것 없이 다 소유하며 살았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때를 따라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며 사는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해 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조금도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훌륭한 아버지의 권위 아래 살며 명령에 복종하며 사는 것에 대한 불평인 것입니다. ‘왜 내가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 명령을 받고 종처럼 살아야 되느냐!’ 하루속히 아버지 슬하를 떠나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아버지를 떠난 삶

 그러자 그는 그 재산을 다 청산해서 아버지의 권위를 떠나기 위해서 아버지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또 아버지의 간섭이 있을까 해서 아버지 손길이 미치지 못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방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이 당연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언제나 있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연지사가 항상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도 기근이 오고 환경적 기근과 궁핍이 다가온 것입니다. 아버지께 받은 재산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벌지 않고 쓰니 그 쓰는 재산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얼마 있지 아니하여 재산도 바닥이 나고 설상가상으로 그곳에 기근이 와서 먹을 것, 입을 것, 있을 곳도 얻기가 힘들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3. 깨달음과 은혜

 호구지책의 어려움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을 구하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겨우 얻은 것이 어떤 농부의 돼지우리에서 돼지 치는 직업을 갖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치는 직업은 제일 천한 직업입니다. 그것은 도시 안에 있지 않고 저 변두리에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돼지를 치면서도 배고프고 춥고 괴로움이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나누어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리고 짓밟혔습니다. 배가 너무나 고팠고 추웠으며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들은 어찌할 수 없이 아버지 집에 살던 옛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해외에 가서 잘 살 때는 부모에게 일년에 전화 한번 할까 말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화가 자주 오면 큰 탈이 난 것입니다. 열흘이 넘지 않고 “아버지, 어머님 잘 계십니까?” 이렇게 연락이 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우니까 부모의 슬하에 살던 그 옛날의 추억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당연지사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탕자도 누가복음 15장 16절로 17절에 보면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려 죽게 되자 의식주의 생활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크신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매일같이 자고, 깨고, 일어나고, 마시고 사는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굶주려 죽게 되어보니 그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특별하신 배려와 사랑과 돌보심의 따뜻한 손길이요,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당연지사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탕자

 은혜만이 그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이 아들에게는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그가 신발을 신지 못하고 등에 옷이 다 벗겨지고 손이 터지고 배가 굶주려지고 얼굴이 뼈만 남은 것처럼 앙상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생을 사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혜’ 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자고, 깨는 것이 당연지사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아버지의 은혜 아니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를 찾아서 돌아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이제는 아버지를 당연지사의 아버지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은혜를 베푸는 주인으로 섬기고 자기가 아들이 된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품꾼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큰 변화가 왔습니다. 당연지사일 때는 아버지가 자신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들이니 상속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고 보니 아버지가 크고 위대하게 보입니다. 자기는 너무나 비천한 품꾼으로 보인 것입니다. 태도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은혜를 모를 때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고 교만했지만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부터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 것 없으며 비천한 지 깨달아 알게 되고 은혜 베푸는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하고 자상스러운 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19절에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말한 것입니다.

 

 5. 은혜를 아는 자에게 더하시는 은혜

 누가복음 15장 22절로 24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아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아버지를 버리고 나갈 때 아버지의 마음은 크게 섭섭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나 자기 몫을 주었습니다. 탕자가 깨닫고 깨어져서 이제는 종으로서 품꾼의 하나로 보아달라고 겸손해지고 은혜를 알 때 하나님은 구하지도 않았는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모르고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여 달도 당연지사요, 자연현상도 당연지사로 준 것이요, 생명도 당연지사로 알고 있다가 내가 병들고 가난하고 직장을 잃어 빈 손들어 비천하게 되고 고통스러울 때 그때 생각해 보면 건강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배불리 먹고 마시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직장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아 버리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면 더 주고,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있는 것조차 기근이 들어 다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안셀름 그륀이 쓴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에는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몹시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 자신을 졸졸 좇아 다니는 그림자가 미워서 “물러가라! 물러가!” 그리고 돌아보면 또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림자로부터 피하려고 뛰니까 순식간에 발뒤꿈치에 그림자는 따라옵니다. “요놈의 자식 못따라 오게 내가 죽도록 뛰어야 되겠다”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심장이 입으로 튀어 나올 정도로 뛰다가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뛰어 달아나던 그 옆에 큰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이고 나무숲으로 들어갔으면 그림자는 사라졌을 텐데 왜 나무숲에 들어가지 않고 태양빛 아래서 뛰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큰 은혜를 비추고 있는데 그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가지 않고 나의 힘으로 나의 수단으로 나의 지혜로 나의 총명으로 나의 노력으로 살겠다고 뛰어간다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누우며 더 애쓰고 더 힘써서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지치고 피곤하고 좌절과 절망에 들려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내 뒤에 따라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피할 곳이 있습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들어오면 그림자가 사라질 것인데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의 그림자를 뒤에 걸머지고 뛴 것은 십자가 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은혜 속에 들어오면 은혜가 우리를 구출해 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못사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에 의지하고 나를 자랑 삼을 때는 은혜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내 주먹을 믿고 산다. 내 능력을 믿고 산다. 내 학력을 믿고 산다. 나의 능력으로 산다’며 자기를 의지할 때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6. 십자가의 은혜

 내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절대로 내 힘으로 죄를 청산할 수 없어 마음에 죄책과 정죄감으로 고통을 당할 때 아무리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애써도 못하고 죄로 고통당할 때 그때 우리는 죄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털어 버릴 수 없고, 나의 죄를 용서해줄 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밖에 없다고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은혜로 용서와 의를 얻게 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알고 십자가 밑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깨끗하지 못할 때 아무리 씻으려고 해도 세상과 마귀가 들러붙어서 음란하고 방탕하고 술 취하고 세속적으로 살고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아무리 씻으려고 해도 안 될 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애를 써도 안 되고 힘을 써도 안 되고 노력해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할까요?’하며 십자가 밑에 나오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 힘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못산다는 것을 깨달아야 예수님께 나와서 성령으로 체험 받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픈 것을 알아야 밥을 찾게되고 내가 목이 마른 것을 알아야 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옷을 벗은 줄 알면 옷을 찾는 것과 같이 자기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 것을 알아야 주님께 나와서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많은 크리스천 화가들이 돌아온 탕자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그림이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입니다. 수채화로 그린 이 그림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신발이 다 헤어져 왼쪽 신발은 아예 신을 수 없어 벗겨져 있고, 오른쪽 신발은 다 닳아서 밑창이 없이 구멍이 나서 발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신분을 상징하는 겉옷은 없고 남루한 속옷 한쪽을 걸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마치 죄수나 범죄자처럼 깎아버렸습니다. 그런 그가 마치 왕처럼 보이는 아버지의 가슴에 왼쪽 귀를 대고 안겨 있습니다. 빛나는 황금 팔찌로 팔을 장식한 아버지는 냄새나는 아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마냥 행복해 합니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탕자나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잃은 아들이 돌아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기에 너무나 더러운 아들입니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온몸은 상처투성이고 돼지 똥냄새가 나고 옷은 반 벗었고 신발은 거의 벗겨졌고 몸은 남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가 봐도 아버지와 같이 저명하고 부자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장식을 한 그분이 그를 끌어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그 아들이 나갈 때는 은혜를 모르고 나갔고 모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나갔다가 고난을 통해서 깨어져서 이제는 은혜를 알고 돌아온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사는 것이 품꾼으로 살아도 얼마나 은혜인지 깨닫게 된 아들을 아버지가 더러운 그대로 못난 그대로 병든 그대로 추악한 그대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은혜를 모를 때는 잃은 아들이요, 당연지사로 살 때는 죽은 아들인데 은혜를 깨달아 알고 은혜를 찾아 들어오는 자는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빈 손 들고 벌거벗었을 때 돌봐주시고 입혀주시는 은혜가 감격적이고 감사하여 그 은혜가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다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의 품에 의지해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면 아버지와 내가 한 팀이 되어서 아름다운 삶을 사니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예수 믿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뽑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당연지사가 아닙니다. 독재국가에 가면 지도자를 뽑을 권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지도자가 일어나면 순종하고 따라갈 따름이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교회 나오신 것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것입니까? 지금도 병들어서 병상에 누워 있으며 심한 병에 걸려서 위독한 사람이 얼마나 많고 휠체어에 앉아서 스스로 차를 타고 올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얼마나 자유롭게 걸을 수 있습니까? 사지가 멀쩡하고 백체가 멀쩡한 우리들 자신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저 앉아도 감사요 서도 감사요 앉아도 감사의 눈물이요 서도 감사의 눈물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서 부부간에 이렇게 말하시길 바랍니다. “여보 당신 내 곁에 있어서 감사해요” “당신이 살아 있어서 감사해요. 건강해서 감사해요. 우리 조그마한 전셋집이라도, 월세집이라도 들어가서 살 수 있으니 감사해요” 감사를 찾아 말씀하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탕자처럼 아버지 집에 살 때 모든 삶이 당연지사로 알았습니다만 당연지사가 다 나를 떠나고 내가 빈손 들게 되고 헐벗고 고통스럽고 굶주리면 그것이 당연지사가 아니고 아버지가 돌보아 주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너무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원망 불평이 감사보다 앞섰습니다. 항상 비교인생을 살아서 남과 나를 비교하고 환경과 비교하고 자기에게 없는 것을 불평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헤아려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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