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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내가 쉬게 하리라

by 삶의언어 posted Jun 11, 2024 Views 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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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소망/위로
예배드린 날 2009-02-22
오늘의 성구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1Own4VSWWTs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8∼30절

 

십자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내려놓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따라가면
힘든 세상에서 쉽고 평안하게 살 수 있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엿새 동안 지으시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반드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같이 복잡한 산업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휴식 없이 7일 동안 계속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으면 고장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휴식 없이 일하면 결과적으로는 병이 들고 맙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설교 통역을 하다가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제직들이 저를 업고 적십자 병원으로 가서야 제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새벽기도에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니까 장로님 한 분이 상담을 하자고 찾아왔습니다. 저를 보시더니 “목사님은 굉장히 교만하시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아픈 사람을 보고서 위로는 안 하고 교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장로님은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위대한 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하루는 쉬셨는데 목사님은 왜 쉬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좀 맡겨야지 교만하게 자기가 안 하면 못한다고 생각하면 오래 못 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장로님의 그 말이 제 생애 속에 잊혀지지 않고 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레 동안 내내 일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일하면 얼마 못가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활짝 내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떠나가라” 그러는데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거든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체적인 짐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마음의 짐입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짐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개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자녀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턱 내려앉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죗값을 받는가보다’ 그런 죄책감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심성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싶은데 자꾸 술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담배를 끊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담배를 피웁니다. 방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방탕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미워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자기가 포로로 잡혀있어서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 슬퍼하고 있습니다. 병은 육체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들면 마음도 굉장히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가족에게 부담이 되고 자녀들에게 짐이 되니 마음이 부담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생활에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속에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인생을 사는 것이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너무 허무하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가 짓누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결국 사람은 다 죽어야 하니까 죽음이 우리에게 허무의 짐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잘났다 해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하드필드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의지가 육체적 힘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했는데, 이를 위해 손으로 쥐는 ‘악력’을 측정해 분석했습니다. 우선 세 사람의 남자를 불러다 놓고 악력을 측정하기 위해 악력계를 손으로 쥐어 보라고 했습니다. 보통 상태에서 평균 악력은 45㎏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의사가 그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약골이다. 육체의 근육을 보니까 힘을 못 쓰게 돼있다. 영양실조다. 힘이 없다” 그렇게 약하다고 인식을 시켜 놓고 또 다시 주먹을 쥐라고 하고 보니까 겨우 13㎏의 악력 밖에는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때 45㎏을 쥐던 사람이 약하다고 인식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13㎏밖에 쥐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실험하는 사람이 “당신은 굉장히 강하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의 근육을 보니까 훨씬 더 무거운 것을 걸머질 수 있다. 힘이 있다. 약하지 않다. 튼튼하다”라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용기를 주고 측정을 하니까 무려 68㎏을 쥐었습니다. 보통 때는 45㎏을 쥐고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13㎏을 쥐던 사람이 강하다고 용기를 주면 68㎏을 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힘의 절반 이상이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에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나는 강하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강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리 육체 생활에 굉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지만 ‘나는 못났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무엇 하나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인데 마음이 약해지면 육체적으로도 모든 생활이 다 미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육체의 짐을 진 사람도 마음의 짐을 진 사람도 다른 데 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용기와 힘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연약한 사람이 강하게 되고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더 강하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2절은 예수님에 대해서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광풍을 피하는 곳 같은 사람,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은 사람, 마른 땅에 냇물 같은 사람,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은 사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광풍을 피한다는 것은 뭡니까? 광풍이라는 것은 지상에 불어닥치는 환난의 풍파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의 풍랑을 만나 거의 침몰할 뻔한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환난과 고통의 풍파가 광풍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온 세계는 경제적인 광풍을 만나서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가 모두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왕우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광풍이 불 때도 피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이나 재능을 가지고 광풍을 피하려고 하면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광풍을 피하게 해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폭우를 가리는 곳 같다고 말씀합니다. 폭우라는 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면 별 도리 없이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오래 기다리시지만 우리의 날수가 다 찬 뒤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을 피하게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폭우를 가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십니다. 땅에 물이 없으면 아무 생물도 살 수 없습니다. 벌레도 고기도 동물도 못삽니다. 그러나 그 마른 땅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당장 풀들이 돋아나고 생명들이 생겨나고 고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황막하고 사막같이 됐을지라도 예수님이 오시면 샘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샘물이 되셔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희망이 없는 곳에는 희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을 주는 생명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이 황막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메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은 샘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모시면 주님이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셔서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라고 말씀합니다. 곤비한 땅이란 뭡니까?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이 땀을 흘리고 지쳐 배가 고파 쓰러졌을 때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햇볕은 내리쬐고 땀은 계속 나고 허기가 져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바로 근처에 큰 바위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겨우 기어가서 바위 밑에 들어가니까 너무 시원하고 바위 밑에 흐르는 샘물에서 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차릴 수가 있습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삶을 재생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기면 세상의 뜨거운 햇빛에서 피할 수 있고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피할 수가 있고 메마른 공기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일하고 난 다음 피곤할 때 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가 살기가 힘들었지 않습니까? 저는 한국전쟁 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밤에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했습니다.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데 초저녁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저녁이 지나고 나서 저녁을 먹고 난 다음 새벽까지 일할 때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흑인 병사가 와서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그러나 때리고 차도 관심이 없습니다. 좌우간 맨땅에라도 앉아서 잠을 자야지 자지 않고는 못 견디겠습니다. 제가 그때 느꼈습니다. ‘사람이 쉬지 않고는 못산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 힘이 끝까지는 안 간다’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쉬게 해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교회에 나와서 주님 품에 들어오면 마음에 휴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품에 들어가는 것은 힘이 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길들임을 잘 받은 것입니다. 가축인 소나 양이나 염소는 온유한 가축입니다. 그러나 사자나 호랑이는 온유하지 못합니다.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나운 짐승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잘 길들여진 사람은 하나님께 아주 순종을 잘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왈가닥이 돼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순종하고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 온유한 사람을 받아주십니다.

 한 선교사님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사람이 너무나 낙심을 하고 얼굴이 창백하고 지금이라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면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군. 당신이 내 처지에 있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디 계세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기차가 막 흔들리는데 만년필을 두고서 “이 만년필을 테이블에 세워 보십시오”하니까 “나를 조롱하는 거요? 이렇게 흔들리는 기차에서 만년필을 세우라니 어떻게 세운다는 말이요?”하고 되묻습니다. “나는 세울 수 있어요” “어디 세워 보세요” 선교사님은 만년필을 손으로 잡은 채로 만년필을 세웠습니다. “세웠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보는 겁니까? 만년필을 손으로 잡고 세우면 누가 못 세웁니까?” “만년필을 그냥은 못 세우더라도 손으로 잡으면 세워지는 것처럼 인생도 혼자서는 못설 때 주님의 손이 붙잡아주시면 설 수가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이 크게 감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못 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면 우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부패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 짐을 내게 맡기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내 멍에 밑에 들어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중동에서는 밭을 갈 때 언제나 어미 소의 멍에 밑에 새끼 소를 같이 넣어서 밭을 갑니다. 어미 소가 잔뜩 힘을 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에를 끕니다. 그런데 새끼 소는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엄마가 왜 저렇게 땀을 흘리고 야단일까? 나는 아주 가벼운데’ 왜냐하면 멍에가 엄마 목에 걸려 있지 자기 목에 안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멀리서 보기에는 새끼 소의 목에도 걸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마 소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따라가니까 자기는 쉽고 가볍게 걸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걸머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걸머졌기 때문에 우리는 온유하게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면 쉽고 가볍게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의 십자가에 다 얹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마음의 짐, 육체의 짐, 생활의 짐을 짊어지고 내게 와서 내게 맡겨라. 짐은 내게 맡기고 내 밑에 들어와서 순종하고 온유하게 따라가면 너는 쉽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쉽고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겸손하게 낮아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우리를 돕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는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지만 우리에게는 쉽고 가볍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패 때문에 우리가 쫓겨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몸 찢기고 피 흘려 부패를 다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병 때문에 우리가 병을 걸머지고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주를 걸머지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저주를 받아 나무에, 십자가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서 공짜로 죽었다가 쉽게 부활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쉽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고 치료받고 축복받고 죽고 부활해서 영원한 천국을 얻어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사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한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오늘도 불안, 초조, 절망 등으로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가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께 의지하면 마음과 생활에 쉼을 얻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냥 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고 또 지금도 짊어지기 위해서 십자가의 멍에를 걸머지고 우리에게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종교적으로 믿지 말고 형식적으로 믿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고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인생은 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정신적인 짐이 너무나 무거워 우울증에 걸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육체적인 짐도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고 고통이 한없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이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습니까? 사람이 못 지는 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살아가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주께 모든 짐을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세워 주시옵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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