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예수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난 다음에 예수께서 나의 생애 속에 행하시는 그 여러 가지 역사를 체험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성서에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지 사흘만에 부활하사 승천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방정을 가지고서 과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증명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구주로 마음속에 모셔들일 때 이 부활하신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시고 이것을 우리가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그와 같은 위대한 부활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애 속에 체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신앙은 체험으로써 확정되는 것이지 인간 이상으로써 논리로써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과연 2천년 전에 죽었다가 무덤에서 사흘만에 부활해서 오늘날도 부활의 주로써 계신지 안 계신지 이 사실은 여러분과 나의 삶 속에서 부활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깊은 감동으로 체험해주므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부활한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영접해드릴 때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날까요.
첫째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주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들일 때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부활의 위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를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었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하기를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뭘 죽었다고 말합니까? 그렇게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죽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대단한 오해요 잘못인 것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교통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샘물에서 끊어진 물은 아무리 물이 고여 있어도 그것은 죽은 물이요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혼을 하고 좋은 집에서 좋은 호의호식하고 잘사는 가정이라도 남편과 아내의 교통이 끊어지고 대화가 끊어져 버리면 그 결혼은 살았다 하나 죽은 거이고 그 가정은 산 형태는 가지고 있으나 죽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여러분 대화가 끊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 어머니, 아들, 형제 서로 대화를 하고 사랑하고 교제가 있었는데 죽자마자 그만 대화가 끊어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울어도 함께 울지 아니하고 웃어도 함께 웃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대화가 끊어질 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은 육신의 존재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죽을 수 없는 불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불멸의 존재가 육신의 장막집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생을 지으시고 에덴을 만드시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가 나게 하시고 그 속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의 모든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했는데 마귀의 꾀임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권위를 짓밟고서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성경말씀대로 그들이 죽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도 900년 동안 살아 있었는데 왜 죽었다고 말합니까? 육체는 살아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 극적인 장면으로써 그들은 성전인 에덴에서 쫓겨나 버리고 말았고 그때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도 들을 수가 없고 또 부르짖어도 하나님께 응답이 오지 않았었습니다. 눈의 형태가 있어도 시신경이 죽은 사람은 빛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무지개를 바라보고 "저 무지개 보아라. 저 주황, 황, 록, 청, 남, 자 이와 같은 아름다운 색깔이 합쳐 있지 않느냐. 무지개를 보아라." 아무리 말을 해도 시신경이 죽은 눈이기 때문에 무지개에 대한 분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고막이 죽은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베토벤의 음악을 틀어도 그 선율이 귀에 전혀 분별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냄새맡는 감각이 죽은 사람에게 장미꽃 향기를 아무리 갖다놓은들 장미꽃 향기를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영적으로 하나님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분리되어서 죽어버린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열린 창문이 닫힌 것과 같아서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개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도 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마음속에 전혀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은 알지 몰라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아무리 학 박사의 자격을 가져도 전혀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신경이 죽은 사람이 빛을 분별하지 못하고 청신경이 죽은 사람이 음악의 선율을 분별할 수 없는 것처럼 영이 죽은 사람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아담과 하와 이후로 오늘날 그 백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영적으로 죽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고 무신론자로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가장 기적적이고 위대한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자마자 이 절망적이게 죽었던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그리고 난 다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 지식, 반응이 생겨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죄없는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여러분의 죄, 나의 죄, 우리의 불의와 추악을 십자가에서 청산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악의 담을 헐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실 수가 있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과 나에게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우리 마음 문을 열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셔드리자마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마치 조수와 같이 우리 영혼 속에 몰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자마자 부활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자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게 하고 영의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마음속에 감동을 주고 영의 감각이 깨달아져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되고 입술이 열려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영적인 생명이 약동해서 기도하고 찬미하며 전도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오게 되고 주의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전혀 전에는 육신의 세계 속에서 살던 사람, 감각이 의지해서 살던 사람이 그 생애 속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 아닌 신령한 세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아들 예수님이 구주가 되시고 성령이 와서 감동을 해주십니다. 이제는 성경이 살아나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와 판단력과 그 능력이 우리의 생애 속에 깨달아지고 우리가 전에 하지 않던 세계로써 기도로써 하나님과 대화하고 말씀을 읽음으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그리고 우리가 찬미를 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되는 새로운 부활의 세계가 여러분 속에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한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이 교회에 나와서 찬미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아멘을 하고 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부활해서 여러분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죽은 여러분의 영혼이 부활해서 살아 일어난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우리 체험적인 증거는 우리의 가슴속에 양심이 부활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타락과 함께 인간의 양심은 부패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적으로는 하나님의 갑?? 위대한 발명과 발견을 하고 인간의 능력은 가히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지배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됐지마는 인간의 양심은 부패하고 패역했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양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제는 양심의 소리가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살 때 정욕의 소리는 강하고 양심의 소리는 연약해서 미세함으로 말미암아 정욕을 이길 수가 없는 양심이 돼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또한 양심을 타락한 사람은 더러운 양심을 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에 보면 양심이 더러워져서 더러움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부패와 가증스럽고 더러운 것을 해도 이것에 대해서 양심이 거리낌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악한 양심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 보면 악한 양심이 되어서 악행을 심판하지 못하는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악이 횡행해도 양심이 그것을 보고 심판을 못하고 그대로 동조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더 무서운 것은 이제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완전히 감각이 마비되어서 양심이 양심의 역할을 전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에는 별이 있어야 되고 지상에는 꽃이 있어야 되고 사람의 가슴속에는 양심이 있어야만 하는 것인데 오늘날 사람의 양심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약하고 더럽고 악하고 화인 맞아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전쟁과 전쟁소문이 끊이지 않게 일어나고 부패와 부정이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학문을 배워서 지식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양심이 부패해진 사람이 올바르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세계는 잘 살기 위해서 경제 부흥을 합니다만 지식을 많이 가지고 경제 부흥을 아무리 해도 그 경제 부흥을 한 사람들이 약한 양심, 더러운 양심, 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지식과 그 경제 부흥으로 자멸의 구덩이를 파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이 세상은 인간에게 지식적인 인간만 만들려고 하지 말고 경제적으로 잘사는 사람을 만들지 말고 윤리적인 인간, 도덕적인 인간으로 개조시키기 위해서는 양심에 변화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변화는 교육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왜? 약하고 더럽고 악하고 화인 맞은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심에서 부활하는 도리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양심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중생 하면 선한 양심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예수를 구주로 모시자 우리의 마음속에 양심이 부활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고 성경을 찾아 나가게 하는 것은 선한 양심이 우리 가운데 활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청결한 양심이 부활한다고 했었습니다. 죄의 더러움을 심판하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청결해서 회개하고 의로운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청결한 양심이 부활하며 또 나아가서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보면 착한 양심이 부활해서 무법과 불의를 꾸짖고 믿음과 순종을 가져오는 착한 양심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이와 같이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 착한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지식은 가치가 있고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하게 된 물질적인 부흥이나 환경의 선한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세상이 여러분 양심이 바로 되지 못하고 약하고 더럽고 악하고 화인 맞은 양심으로써 살면 지식은 더 악하게 사용되고 경제 부흥과 좋은 환경은 더 더럽게 악하게 더 파괴적으로 사용되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여러분 이 양심의 부흥이 없으면 인간은 그 무서운 전쟁의 무기를 가지고 이 거대한 경제력을 가지고 얼마 있지 아니하여 파멸의 무덤을 파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개인이 사는 길, 가정이 사는 길, 사회와 국가가 사는 길은 양심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부활은 진실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에게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부활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그 양심의 부활을 가져와서 그래서 어찌 할 수 없이 청결하고 착한 양심의 끌림을 받아서 제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인간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러한 위대한 양심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한 분을 볼 때 하나님의 기적에 참 깊이 감격을 합니다. 지금은 참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남편이 세상을 뜨자마자 그 자매님이 아주 인물도 괜찮고 수완도 좋고 애교도 충분하고 그래서 뭘하냐 하면 서울 시내에서 내놓으라 하는 재벌들을 유혹해서 집에 와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집이 호화 찬란하기가 말할 수 없어요. 모 다이아 반지도 이만 저만한 것을 끼고 있지 아니하고 은, 금이 풍부했어요. 좌우간 유명한 재벌들은 이 부인에게 안 걸려 들어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개 그 부인의 집에 와서 한번씩은 다 1박하고 가요. 가면 몇백만 원, 몇천만 원 수표를 던지고 갑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이 이 세상의 부러울 것이 없이 삽니다. 살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나서 우리 교회 구경하러 왔습니다. 심심하니까 예수 믿으러 온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구경하러 와서 이 교회에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그만 하나님의 성령이 그 마음에 임하여서 두 날 가진 검처럼 그 심령을 꿰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고 울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회개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내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눈이 퉁퉁 부어서 들어왔는데 퉁퉁 부은 눈이지만 .....보니까 굉장히 매력이 있어요. '하하, 이 정도가 되니까 사람들이 끌려가는 구나.' 그러면서 그 다이아 반지를 뽑아 가지고서 "내가 견딜 수가 없으니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다. 하나님 사업에 바치세요." 그러자 그의 생애 속에 여러분 예수님이 들어와서 그 양심을 부활시켰는데 선한 양심이 들어와서 그 생활을 청산하지 아직 못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교회를 나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청결한 양심이 부활해서 그는 죄를 통곡하고 웁니다. 그리고 착한 양심이 들어와서 자기는 이 불법적이고 무범한 삶을 살지 말아야 되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일시에 청산이 안됩니다. 왜? 사람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도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양심이 부활했기 때문에 바울 선생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시간만 있으면 제게 와서 통곡을 하고 울고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점점 선하고 청결하고 착한 양심이 살아 일어나므로 말미암아 그는 정욕의 줄을 하나 둘 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년이 되지 못하여 그의 생활은 완전히 청산되고 그 다음부터 아주 열심 있는 신앙자가 되고 지금은 외국에 이민 갔습니다만 이민 사회에 들어가서 불꽃같이 전도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께로 인도하는 그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게 될 때 양심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도 놀라운 것인가 저는 언제나 감탄을 하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 더 많은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더 많은 의식이 아닌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만나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의 가슴속에 선하고 청결하고 착한 양심이 부활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나라가 부강하고 발전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양심의 부활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참 지식이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여러분 이 세상에 살 때 우리의 지식이란 것은 감각적인 지식입니다. 눈으로 귀로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추리해서 얻은 세상 적인 지식이요 이 세상 적인 물질의 한계를 넘어서 저 감각적으로 체험해 볼 수 없는 영적인 신령하고 영원한 지식과 지혜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세상의 지혜나 지식을 따라 살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지식이 있다 하나 정말 참 지식이란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장 22절로 23절에 보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도다"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사람을 섬기고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우상밖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아가서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지혜라는 것은 종국에 가서 멸망할 것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여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믿는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부활하신 것,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은 세상 적인 지식이나 지혜로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왜? 그 지식과 그 지혜는 멸망할 지식과 지혜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성령이 와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올 때는 비로소 영감 적인 지식, 계시적인 지식이 와서 그래서 영원하고도 무궁하며 신령한 세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적인 지식은 초등 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연구실을 통해서 우리가 얻습니다만 그러나 하늘의 신령한 지식은 이와 같은 학교에서나 연구실에서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는 얻을 수 없습니다. 제게 가끔 와서 대학생들이 하는 말이 우리 교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개 박사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나는 말합니다. 그 사람은 교수가 될 수는 있고 세상 적인 지식에 박사가 될 수 있어도 그러나 신령한 세계는 지식이나 연구는 얻을 수 없으니 거기에 대해서 말할 권위가 없다고 제가 언제나 말합니다. 왜? 여러분 하늘나라의 지식은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주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례요한이 목 쳐 죽었는데 다시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큰 권을 행하시니까 엘리야가 살아났다고 그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주님께서 늘 울고 다니시니 예레미야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약선지자의 어떤 사람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난 다음에 아주 정면으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그만 갑자기 한 대 맞았습니다. 정신이 어리벙벙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얼굴에 갑자기 빛이 비췄습니다. 희색이 만연했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심전심의 전율이 통합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고 시몬을 보시고 고개를 끄덕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것은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오늘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혈육으로 연구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계시해 주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러므로 오늘 여러분과 내가 얻는 이 참 지식은 주께서 주었다가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에게 계시해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전에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알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속에 계시가 와서 믿어지게 되고 성경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을 때 이것이 마음에 감화와 감동이 와 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판단력을 성경을 통해서 얻어서 초인적인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지 아니하면 하나님 말씀을 알 수가 없는 것은 나는 언제나 마음속에 더 깊이 느껴집니다. 제가 옛날에 아주 무당을 많이 하던 할머니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다가, 전도하다가 안돼서 성경을 한번 사다 주었습니다. 이 성경을 읽고서 예수를 믿어라. 그러니 무당 할머니가 내가 성경을 사주니까 시골 할머니니까 성경이 귀하자나요. 고맙다고 읽어보겠다고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 저 무당 할머니를 감화감동해서 성경을 깨닫게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얼마 있다가 그 성경책을 도로 가져왔어요. 나보고 "이거 성경 준거 도로 받으세요."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아이고 이걸 좀 읽어보려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라 그래서 목욕재개를 하고 머리를 빗고 앉아 가지고 읽으니까 어찌 하나님의 잔소리가 많은지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 아무리 읽어봐도 전부 잔소리 뿐이야."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하하, 성령이 감동하지 아니하면 모두 다 잔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구나.' 그런데 그 다음 그 할머니가 인도를 받아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들어오자마자 그 다음부터 성경을 가지고 살아요. 그저 이 창세기부터 계시록 가지고 살아요. 성경을 읽고 또 읽고 감사하고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아들은 신학교 보내서 목사로 만들고 그리고 자기는 집사가 되어서 나중에 권사까지 되고 온 가족을 다 주께로 인도하고 이제는 재작년인가 천국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부활한 예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자 비로소 그 영감으로서 계시로서 우리가 깨달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지식은 부활의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 이제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분별력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를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성도 중 한사람에게 아주 좋은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동생이 어디 가시면서 4살 먹은 조카를 누님에게 맡겨놓았습니다. "누님, 우리 아들 좀 잘 돌봐주세요." 4살 먹은 애를 맡겨놓았습니다. 그래서 누님이 그 애를 맡아서 방에 재워놓고 그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부엌에 밥 안 해놔서 정신이 없이 밥하고 아침밥 먹으라고 방문을 열어보니까 4살 짜리가 온데간데 없어요. 이 애가 깨보니까 자기 집이 아니니까 그만 밖으로 나가서 집을 찾아간다고 나가버렸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입니다. 그 집을 열고 나오면 그냥 길거립니다. 너무 놀래서 간이 그냥 땅에 떨어집니다. 뛰어나가서 보니 버스가 지나가고 자동차만 지나가고 사람들만 출근이니까 왕창 지나가는데 4살 먹은 말도 못하는 애는 어디 갔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내 자식도 아니 동생의 자식을 맡아서 잃어버렸으니 이를 어찌 합니까? 동동걸음을 치고 '아이고 하나님이여 어찌하나요.' 경찰서 파출소 가서 물어보니 못 봤다고 주위에서 4살 짜리 걸어가는 거 보았냐고 하니 못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만 동동 걸으며 '아이고 하나님, 내 조카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데 길거리에서 마음속에 '버스 타라. 버스 타라.' 그르더랍니다. 아, 이 세상에 4살 짜리가 걸어나갔는데 왜 버스를 타라고 합니까? 그러나 별 도리 없어서 마음속에서 자꾸 버스 타라고 하기 때문에 그만 그 생각을 따라서 버스를 탔어요. 어딜 가는 것도 모르고 탔어요. 이 버스가 종암동으로 가는 버스라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정처 없이 이 조카를 찾게 해달라고서 부르짖으면서 창문을 내다보고 있는데 버스가 고려대학 앞을 지나가는데 보니까 그 4살 짜리가 턱 걸어가고 있어요. 그래 그냥 버스에서 내려 가지고서 뛰어가니까 이 녀석이 자기 집 찾아간다고 나와 가지고서 벌서 몇 시간째 걸어 갔는거라. 그래 가지고서 지금 고려대학 앞을 걸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그 조카를 찾아서 데려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 조카가 고려대학 앞을 걸어갈 줄 누가 알았습니까?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버스를 타고 가라고 지식을 넣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그 간증을 적은 것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영생에 대한 것과 신령한 세계와 이와 같은 지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감각지식이 아닌 계시적인 지식을 받아서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데로 말씀을 좇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러분 속에 와 계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또 마지막으로 우리는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위대한 소망이 우리 가슴속에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부활의 그 위대한 능력으로 여러분과 나를 그에게 젖붙여 주었습니다. 감나무에 젖붙이면 감이 열리고 배나무에 젖붙면 배 열리듯이 우리는 예수께 젖붙임을 받아 여러분과 내 영혼이 부활하고 양심이 부활하고 우리의 지식이 부활할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조차 부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처음 아담은 산 영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는 우리를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45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 그러므로 첫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 다 죗값으로 영원히 죽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마지막 아담 예수께서 죽음을 박차고 사망을 피하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 안에 붙은 우리들은 이미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육체 속에 부활의 생명의 씨앗이 심어진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약한 몸이 강한 몸을 썩을 몸이 영원히 살 몸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소망찬 약속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형제, 친지가 죽더라도 소망 없는 사람같이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잠시잠깐동안 우리가 그 옛 육신을 흙 속에 부탁하지마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부활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로 58절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사망의 이기는 것 사망의 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 찢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사망을 철폐하고 무덤을 파헤치고 주님께서 일어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주님께서 선포한 것입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이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 속에는 부활의 씨앗이 심어졌기 때문에 비록 우리 육신의 몸이 죽더라도 이 육신의 몸이 다시 부활할 소망을 가지고 있고 그날에 우리가 모두다 부활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 영원한 영광 속에 들어갈 것을 알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바울 선생은 말씀하기를 "육신의 장막집 바람불고 비오면 새는 이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말씀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러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고 약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낡은 세계와 역사는 안간으로써 조정할 수 없이 고장이 나 버렸습니다. 고장난 버스가 내리막을 그냥 뒹굴어 가듯이 역사는 나동그라져서 이 시간에 어찌할 수 없이 아무도 운전할 수 없는 처지에서 굴러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언한데로 인생의 역사는 이제 종말에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역사가 종말의 수레바퀴가 빠져서 처박혀 버릴 때 여러분 여기에서 주님께서 만드신 새롭고 찬란한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싸움이 없는 세계,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계, 영원한 삶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새롭게 하고 땅을 새롭게 하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강림하여 오시고 그래서 주와 함께 영원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날을 바라보고 우리는 이 부활하신 예수 앞에 우리의 영도 마음도 몸도 생계를 내어 맡기고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인생을 살아갈 동안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그는 부활하셨고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으로써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이 즐거운 소식을 우린 매일같이 전도해야 할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의 사명이요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위대한 소망인 것입니다. 이 부활의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어서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것인 것입니다.
- 기 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영혼을 부활시켜주시고 우리의 부패한 양심을 부활시켜주시고 우리의 감각적인 지식 속에 계시의 지식을 부활시켜주시고 우리의 육체도 영원한 부활을 주시게 됨을 감사 하옵나이다. 이제는 우리는 부활의 영광의 빛 속에서 살고 부활의 포로된 사람들이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사랑의 하늘나라 부활의 세계로 옮겨진 것을 아버지 감사합니다. 죄악과 질병, 저주와 절망, 가난과 죽음 이 어두움 무덤에서 오늘 모두다 부활해 나오게 도와 주시옵소서. 절망적이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이고 좌절된 사람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부활의 발랄한 생명 속에 들어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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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by 삶의언어 posted Aug 18, 2024 Views 1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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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 전도/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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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린 날 | 1982-04-11 |
오늘의 성구 |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 말씀 |
설교 영상으로 이동 | https://youtu.be/dcjD7DC3OO4 |
설교영상 관련 설명 |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