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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사물을 바라보는 세가지 눈

by 삶의언어 posted Aug 25, 2024 Views 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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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전도/선교
예배드린 날 1986-03-16
오늘의 성구 요나 2장 1절로 10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mN_2ItiX0mQ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사물을 바라보는 세가지 눈"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똑같이 두 눈을 가지고 있지만은 그러나 그 두 눈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볼 때 자기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바라봅니다. 자기가 별로 이해 상관없는 제삼자가 바라볼 때는 마음에 아무런 이해상관의 묶임없이 공평하게 사물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자기와 이해 상관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볼 때 거기에 자기의 모든 감정이 개입되어서 그래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을 배경으로 삼으시고 우리의 영혼의 구원이라는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와 사물을 바라보십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신앙의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제삼자가 바라보는대로 따라 가서도 안될 것이요, 자기의 이해 상관의 입장에 서서 사물을 바라보고 평론하고 따라가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장성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영원을 배경으로 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쫓아 바라본 그 하나님의 관점을 따라서 우리가 모든 사물을 바라보아야 비로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을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요나의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저 큰 도성 니느웨에 가서 쳐서 외치기를 니느웨가 회개치 아니하면 사십일만에 하나님께서 불로써 멸하겠다고 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그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바라볼 때는 하나님이 보는 관점과는 완전히 틀렸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요, 앗수르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와서 이스라엘의 변경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재산과 가옥을 불태웠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니느웨가 망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인데 그 중에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요나야말로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한다고 하니깐 자기의 이해 상관에 관계된 눈으로 보게 될 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나는 결심하기를 기어코 하나님의 관점으로 니느웨를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이해 상관에 관계된 관점으로 니느웨를 보고, 니느웨가 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절대로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내려가서 욥바로 가는 배의 선가를 주고 표를 사서 그 배 밑창에 들어가서 드러누웠습니다. 요나와 같이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이 탄 줄 모르고 욥바로 가는 배는 상품을 잔뜩 싣고,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으로 지중해의 물을 가르면서 배가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배가 공해로 들어가기 전에 벌써 큰바람이 불어오고 폭풍우가 몰아쳐 왔었습니다. 선주와 선장들과 그리고 선원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어찌하든지 배를 바로 잡을려고 몸부림을 쳤지만은 점점 바람은 거세지고 비바람은 무섭게 몰아쳤습니다. 나중에는 배 안에 있는 모든 화물들을 다 던져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고 어찌하든지 배를 바로 잡으려고 해도 안되었었습니다.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분 풍랑을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바라보는 것은 자기의 양심인 것입니다. 혹시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가 무엇 잘못했기에 이런 풍랑을 만날 수밖에 없는가 반드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원들이 전부 모여서 이 누구 때문에 이런 화가 왔는가? 우리 제비를 뽑아보자. 그래서 선실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내어서 제비를 뽑은 즉 요나에게 딱 걸렸습니다. 니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재앙이 너로 통해서 왔느냐고 물으니까 요나가 하는 말이 내가 만군의 야훼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갈라고 그랬는데 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이러므로 이 배에 큰 풍랑을 만난 것은 나 때문에 그렇다. 어찌 너가 감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가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가? 그래서 이 배에 탄 사람이나 선주나 선장이나 선원들이 어찌어찌 요나를 구출해 볼려고 아무리 애를 써서 그 배는 파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요나보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으니깐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죽을지언정 니느웨가 가서 회개하라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선원들이 요나를 바닷물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럴 때 선원들이 보는 관점과 요나가 보는 관점과 하나님이 보는 관점이 다같이 다릅니다. 선원들은 요나를 들어서 던질 때 큰 풍랑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반역자를 물에 던져버려야 된다. 그리고 물에 풍덩하고 던졌을 때는 이제 지중해 바다에 던졌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나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나 자기들의 경험으로 생각해보나 요나는 물무덤을 하고 죽었지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던지자 말자 바람이 잔잔해지고 풍랑이 그치매 그들은 즐겁게 목숨을 건졌다고 해서 해변을 향해서 배를 저어서 나갔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자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십시다. 요나는 어찌하든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기 위해서 죽더라도 자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작정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에 던지우자 큰 물고기가 와서 그를 덥석 먹어버렸는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으니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난을 체험했었습니다. 끊임없이 물고기가 움직이니 조금도 몸을 가눌 수가 없고, 천지가 아득합니다. 극심한 고난과 음부에 내려간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온 지중해에 물이 자기 위에 누르는 것 같은 것을 느꼈고, 자기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간 그런 느낌이었었습니다. 그보다 더 철저히 하나님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 절망과 고독을 느끼고 재생의 희망이 없다고 그는 느꼈습니다. 요나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될 때 자기는 이제 영원히 사람과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은 무엇이었었습니까? 하나님은 그 제 삼자들이 바라보는 눈과 틀립니다. 요나가 자기 스스로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틀립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바라볼 때 요나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함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기도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요나의 믿음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요나의 구원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나는 이 세 사람의 관점중에 하나를 택해야 됩니다. 제 삼자들의 관점을 택해서 이제 나는 물무덤을 하고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냐, 자기의 관점대로 나는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영원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포기할 것이냐, 그렇지않으면 하나님의 관점을 택해서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 처럼 회개하고 기도하고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인가? 여러분 요나는 무던히도 고집이 센 사람이었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동안 버텨보았지만은 죽지는 아니하고 그 극심한 고통가운데 요나는 하나님의 관점을 택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보는 관점대로 그는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했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출해 줄 것을 믿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택할 때 하나님께서 요나와 함께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물고기를 명하시며 물고기가 선가도 받지않고 요나를 싣고 와서 해변에 토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자기 발로 니느웨에 걸어가서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일내 멸망한다는 것을 선포한 결과에 니느웨가 회개하고 전 도성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도 요나와 같은 이러한 입장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제 삼자의 관점을 택할 것이냐, 자기의 관점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의 관점을 택할 것이냐, 이것에서 반듯이 선택의 결정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선택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두 번째 말씀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관점을 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갈디아우로를 떠나 적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찾아갔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처음에 실패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음 해에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여러 가지 시련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75세때부터 그는 아들을 얻기를 원했었으나 가나안에 온지 십년이 더해서 85세가 되도록 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 제 삼자가 아브라함가 사라를 볼 때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85세 그 아내가 75세니 어떻게해서 어린애를 낳겠느냐, 이것은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인간 경험에서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 삼자들은 차라리 양자를 얻는 것이 좋지않겠는가, 소망이 없지 않는가, 완전히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떻게 보았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지금이라도 소망을 좀 가져보자고 해서 그들은 사라의 여종은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만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었습니다. 기어코 그들의 나이가 아브라함은 백살이 되고, 사라의 나이는 구십이 되었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의 관점으로 보게 될지라도 성경에 보니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을 알았다고 말했었습니다. 이제는 자기들의 보는 관점에도 자기들은 절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저녁에 아브라함이 자고 있는데 밤중에 하나님께서 천막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는 깨어서 일어나 눈을 부비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라, 푸르 청명한 하늘에 별들이 은구슬, 금구슬을 뿌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별들의 수를 헤아려라.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 별을 세아립니다. 헤고 또 헤고, 헤아리고 또 헤아리고, 나중에는 별이 아브라함 안에 아브라함이 별 안에 가득차서 무어가 무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브라함아, 네 자손이 저 하늘에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난처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제 삼자들이 보는 관점을 택할 것이냐, 자기가 보는 관점을 택할 것이냐, 하나님이 보는 관점을 택할 것이냐,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굉장한 방황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관점을 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대한 그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을 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아브라함은 믿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오늘날도 여러분께 제 삼자가 여러분을 보는 관점이나 여러분 자신의 이해 상관으로 보는 관점을 떠나서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일려고하면 기적을 믿지 않고는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 일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더라도 여러분이 다 계획을 하고 착실히 그 준비해 놓아도 하나님이 와서 역사할 때는 반드시 여러분의 계획은 일단 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계획이 완전히 죽고서 여러분께서 이제는 나의 힘으로 안된다고 손 다 털어버리고, 여려분의 계획을 무덤에 장사지낼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서 이제 내가 책임지마, 죽은 자를 살리신 계획으로 살려서 하나님이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일단은 하나님이 모두 죽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보십시오. 그 나이가 85세, 그 아내가 75세 때 자식을 얻기 위해서 인간적인 계획을 세워서, 하갈을 첩으로 얻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 저는 지금까지의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것에도 그렇고, 저 개인적인 일을 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목표로 삼고 계획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을 체험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인간이 손댄 것은 죽이시고 난 다음에 내가 그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무덤에 파묻어 버렸을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에도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일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자기의 생각과 계획이 언제나 하나님 손에서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난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최근에 저희 마음속에 아주 거대한 꿈고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이 열심히 진행해 왔습니다. 이것을 계획하고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제 내 계획이 완전히 죽어서 시체가 되어 내가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진맥진해서 내가 집에 돌아갈 때 어제 내가 이러고 갔습니다. 그러니깐 우리 집사람이 나를 보고 왜 그렇게 기진맥진했냐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하고 꿈을 꾸고 노력을 한 것이 오늘 죽었다. 그래서 장례를 지내고 오는 길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난 다음 제가 오늘 아침 새벽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목표로 하고 꿈을 꾸고 하나님께 계속 집중으로 기도하는 것 완전히 죽었습니다. 장례를 지내버렸으니 하나님께 보고를 드립니다. 그러니깐 아 내 뱃속에서 성령께서 껄껄 웃으셨어요. 그리고 난 다음 하신 말씀은 잘되었다. 이제 니가 계획한 것이 죽었으니 이제는 내 손에 맡겨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내가 이제는 책임지겠다. 반드시 인간의 계획은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를 베풀기 때문에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여러분이 꿈꾸고 계획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될 것은 죽어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서 살려서 하나님의 것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우리가 바라보고 꿈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꿈이 없는 백성은 절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여러분, 한국이 사회가 안정되고 정치가 발전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잘 살아갈려면 한국의 기업가들에게 꿈을 주어야 되요. 기업가들이 꿈을 잃어버리면 한국은 망합니다. 여러분 정치가가 아무리 정치를 잘할려고 해도 한국에는 기업가들이 기업을 잘 해야 됩니다. 나는 한국의 최고의 애국자가 기업가라고 생각합니다. 왜 기업가들이 열심히 투자를 하고 공장을 세우고 사업을 활발하게 해야 그래야 그 곳에 많은 사람이 고용되고, 많은 사람이 고용돼야 먹고 입고 살 수 있는 생활이 안정되고, 생활이 안정되어야 사회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고, 정치가 잘 되고, 사업이 잘 되야 세금을 많이 내어서 또 새로운 공장을 세우고 또 항만을 건설하고 도로를 건설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아무리 왈가왈부해도 기업을 망쳐버리면 나라는 망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 정치가 혼란하고, 사회가 혼란하면 기업가들이 공장을 안 세웁니다. 이 공장을 세워봤자 정치적 혼란가운데서 도저히 사업이 안되니깐 돈을 모아가지고서 고리대금업이나 하면 평안하게 살테니깐 이래서 한 나라가 잘될려면 한 나라의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정치를 해야 나라가 흥하지, 기업자들 범죄인시 하고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을 하는 사람을 모두다 악한 자로 취급하면 그 사회는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치가가 밥 먹여 주나요? 밥 안 먹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여러분 어찌하든지 기도해서 이 나라에 모든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런 정치를 해야만 할 것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꿈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한 사회나 국가나 꿈을 상실한 사람하고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따르는 사람은 위대한 꿈을 마음속에 줄 수 있는 개인과 민족하고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는 억센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것을 억세게 억척같이 잡고 나가야 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 되요. 로마서 4장 19절로 21절에 보면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억척같이 믿었습니다. 백 살에 자기 아내가 아흔 살인데도 불구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을 믿었었으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리시는 하나님을 믿었었으며, 눈에는 안 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 안 잡혀도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부르고 믿음으로 나가는 이와같은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이와같은 요건이 구비되지 아니하면 여러분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택해서 위대한 일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제 삼자가 무엇을 말하는가 따라서 동서남북으로 방황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자기 이해 상관에 부딪쳐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그 조그만 우물가운데서 마음에 탐욕을 가지고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영원을 두고 영혼구원을 계획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자기의 모든 계획이 다 죽어버리고 풍지박산하는 것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되고, 하나님의 부활하시는 계획을 받아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믿는 꿈과 환상을 가지며 억척같은 믿음으로 불퇴진의 기도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저는 여려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 삼자는 뭐라고 하든지 간에,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든지 간에, 하나님이 보는 관점으로 오늘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장 36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쫓아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여러분을 지혜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제 삼자는 여러분을 보시고 저 사람은 학교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깨닫는 여러분이 아이큐도 낮고 나는 지혜와 총명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을 볼 때는 예수가 여러분에게 지혜가 되셨으므로 여러분은 지혜자라고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나는 바보다, 나는 어리석다, 나는 지혜와 총명이 없다, 나는 아무 일도 못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일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믿어야 되고, 꿈을 가져야 되고, 믿음을 가져야 돼요.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께서는 예수를 구주로 믿었으므로 말미암아 여러분 가정문제, 사회문제, 생활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지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의인으로 보신다고 말했었습니다. 제 삼자가 봐도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나를 봐도 우리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보는 관점은 여러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죄를 한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죄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해 버린 것입니다. 제 삼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보는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죄가 다 청산함 받고, 내가 의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 관점에서 받아들여서 나는 의인이라고 여러분도 같이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믿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관점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거룩한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우리를 봐도 우리는 아직까지 죄성이 많은 인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를 봐도 우리 속에 죄악의 부패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믿을수가 없습니다. 이런 꿈을 가져야 됩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께서 이 하나님의 관점을 기적과 꿈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여 주셔서 여러분의 죄송을 제하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나는 구속받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스스로를 지금 보기를 나는 아직 죄인입니다. 나는 아직 부정합니다. 나는 병들었습니다. 나는 저주아래 있습니다. 나는 절망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여러분의 관점입니다. 제 삼자가 여러분을 뭐라고 말하든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면 강건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사놓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는 여러분은 패배자도 아니요, 버림받은 자도 아니요, 여러분 절망자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요,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시를 간구한다는 하나님 말씀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그런 관점으로 보시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관점을 내가 기적으로 받아들여야 될 것인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받아들여야 될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된 사람을 꿈꾸어 보아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억척같이 믿어야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같이 하셔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관점을 따를려고 하면 새로운 삶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고는 안됩니다. 구태의연한 우리가 육의 세계 속에서 살아온 그런 태도로는 안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반드시 기적이 있습니다. 기적을 우리가 믿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관점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받아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꿈을 꿀 줄 알아야 됩니다. 현실의 환경을 바라보고 거기에 억압되지 말고 절망에 짓눌리지말고 침몰하지 말고 여러분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찬란한 내일에 대한 꿈을 꿀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억척같은 믿음을 가질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뒤로 물러가지 않는 절대로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억척같은 믿음으로 여러분이 밀고 나갈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위대한 승리를 가지고 요나와 같이 아브라함같이 승리를 구하면서 살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만군의 야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여, 오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애를 살지 않고 제 삼자가 말하는데 끌려다니면서 살고 있습니다. 삼자가 우하면 우로 따라가고, 제 삼자가 좌하면 좌하고 자기 주관이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매스컴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혹은 어떠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이여, 자기의 관점에 잡혀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자기의 이해관계의 포로가 되어서 좌우를 살피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요나를 본 그 관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 그 관점,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바라본 그 관점,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지고 계신 그 관점을 가슴을 펼치고 바라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생애속에 제 삼자의 관점이나 내 관점을 제껴버리게 도와주시옵시고, 만군의 야훼 우리 하나님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기적을 믿고 꿈을 가지고 억척같은 믿음으로 밀고 나가서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성도들은 말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관점속에서 영원히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삼박자 축복 속에 나누어 줄 것이 있는 삶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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