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러분과 함께 "용서"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잘못에 대한 용서가 없이 정죄와 심판만 있다면 인류와 모든 만물은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외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수하고 실패하고 범죄 하는 것입니다. 실수와 실패 및 범죄는 용서라는 통해서 치료를 받고 재생의 광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으면 치료도 없고 재생도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용서가 우리 개인이나 가정 생활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인류를 위해서 적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항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환경을 통해서 자연 재해를 살펴보십시오. 여름의 폭풍우, 겨울의 눈사태, 혹은 하마가 할퀴고 간 산과 들일지라도 자연은 이것을 용서해 주고 또다시 이름 모를 풀들과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로 옷 입혀 용서와 치료의 과정을 걷습니다. 만일 자연환경이 그에게 가해진 상처에 분노해서 용서하고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자연은 얼마나 황막하고 황폐한 처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육체의 건강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생을 통하여 혹은 과로로 혹은 과식으로 불의의 사고로 상처를 입더라도 몸은 즉시 그것을 용서해 줍니다. 만일 몸이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이 땅에 생명을 오래 부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몸은 그것을 용서하고 곧장 치료와 회복의 과정을 밟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용서와 치료는 삶과 존재를 계속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있어야만 할 일인 것입니다. 용서와 치료가 없이는 삶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 어떠한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용서해야 될까요?
첫째로,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에 대해서 대적하고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에 대하여 실망 혹은 절망한 사람들이 좌절하고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죽이는 자살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자이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아먹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거대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죄를 짓고 난 다음 잘못을 깨달았으면 용서를 구하고 자기를 용서했으면 치료받고 인생을 재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의 잘못을 알았을 때 자기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실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자학을 했습니다. 극단적인 자학의 표시로써 그는 목매어서 죽고 만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치료를 받을 수 없고 자기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마음속에 부정적이고 암울하며 패배적이고 좌절감에 꽉 들어찬 인생을 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어느 곳에 가든지 환영받지 못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누구에게 사랑 받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사람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를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깊이 있게 용서해 줘야 될 것입니다. 자기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였지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힐 때 그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이 안나스와 가야바 뜰에서 심판 받을 때 찾아가서 불을 쬐고 있다가 어릴 비자에게 너도 예수와 한 패라는 말을 들을 때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로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았을 때 그는 마음에 칼로써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는 밖에 나가서 엎드려 통곡하고 울었습니다만 자기를 용서할 수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미워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실망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어둡고 캄캄한 절망 가운데 처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는 자기 자신은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그는 갈릴리로 돌아가서 옛날 배를 도로 끄집어내고 옛날의 그물을 도로 찾아서 먼지를 털고 옛 생활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나가 그물을 던졌지만 그는 자학을 하고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미워했기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물을 던지고 잡아 당겼지만 전혀 고기잡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어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 자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에 집중할 수 없고 그가 일에 성공할 리도 만무한 것입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럴 때 아침 안개가 뿌옇게 낀 해변에서 한 분이 서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무엇을 잡았느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보라."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보니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요한이 말하기를 "예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도저히 자기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예수님을 만날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미웠습니다. 자기가 저주스러울 정도로 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찬물에 뛰어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나왔습니다. 주님 앞에 온 전신에 물을 덮어쓰고 섰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이미 불을 지펴 놓으시고 떡을 구우시고 고기를 장만하셔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떡을 주시고 고기를 주셔서 배불리 먹게 하시고 난 다음 베드로를 용서하는 과정을 주님이 겪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그러면 어린양을 먹이라" "베드로야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 양을 치라" 세 번째 주님께서 베드로야 너는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할 때 베드로는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옵나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너는 일어나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용서하고 중요한 일을 맡기며 주의 제자로서 다시 소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용서를 받자마자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미움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자 자기를 깊이 용서해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났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났습니다. 흑암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길로 일어나서 그는 위대한 사도로서의 일생을 마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 용서를 받자 자아를 용서를 받자 자아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베드로의 체험이었었습니다. 자기 혐오에 빠져 허덕일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깊이 용서를 받으면 자기를 용서할 힘이 생기고 인격의 심청에서 치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의 마음속에 여러분을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나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 실망하고 있는 사람, 자기에 대해서 열등의식과 좌절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용서해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깊이 자기를 용서해야 됩니다. 나는 한 의사 선생이 환자를 치료하다가 그만 환자가 잘못되어서 세상을 뜨고 말은 사건을 보았었습니다. 그 의사 선생은 그 때 얼마나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기를 미워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자기는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주사기를 놓았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서 들어 누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온 눈이 다 충혈이 되고 밥도 먹지 않고 사람들과 대화도 하지 않고 절망에 처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전도하는 사람이 가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성경을 갖다주고 신앙계를 갖다주고 그리고 그의 모든 실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널리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거듭거듭 말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성경을 읽고 깨닫고 난 다음 하나님께 엎드려 통곡하고 울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자 자기를 용서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를 용납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자기를 사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그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 병원을 시작해서 그는 활발하게 환자를 보고 신앙이 좋은 아주 밝고 맑고 환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또 자기를 깊이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주 예수 앞에 우리의 모든 잘못과 실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깊은 용서를 받아들일 때 자기를 용서하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큰 힘이 인격의 심청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용서해줘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해 줄줄 모르고 자꾸만 이웃의 잘못을 파내고 심판하고 정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은 위선자인 것입니다. 아내를 몹시 구박하고 아내를 정제하는 사람은 그 남편 자체가 위선자입니다. 남편을 심히 구박하고 정제하는 이내가 있다면 그 아내는 위선자인 것입니다. 친구의 잘못을 끌어내어서 그 사람을 계속해서 정제하고 남의 잘못을 파헤치는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위선자인 것입니다. 왜냐, 여러분 요한복음 8장 1절로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루 성전에 가서 말씀하시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습니다. 여인의 울음소리, 남자들의 고함치는 소리, 분노에 꽉 찬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다 고개를 돌려보았습니다. 여기에 한 여인이 끌려옵니다. 머리채가 흩트려지고 옷이 찢어지고 신발을 벗었습니다. 상처를 입고 울어서 눈이 충혈 돼 있었습니다. 바리새 교인, 사도계 교인, 율법사 즉 모세의 제자들이 이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리고 고함쳐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써 쳐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찌하겠습니까?" 준엄한 고소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 여자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서 땅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썼습니다. 무슨 글자를 썼다는 말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 율법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추궁했습니다. "이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고개를 들으셔서 거기에 있는 한사람, 한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시고 난 다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엄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두 날 가진 금보다 더 예리하여 위선자들의 가슴을 파헤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찔끔했습니다. 간담이 서늘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로 허리를 숙여서 손가락으로 신속히 써내려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손가락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감추인 죄악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백일 천하에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더 가혹하게 이 여자를 정제하고 심판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백일천하에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그 모습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모두다 도망을 쳤습니다. 돌멩이 다 내버려두고 다 도망을 치고 말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후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고개를 들라, 너를 고소하고 정제하는 자가 있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제하지 않으리니 돌아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 여러분 죄가 없는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위선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빙자해서 이 여인을 가혹하게 처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한가지입니다. 옛말에 종이 종을 부리면 촛대 뼈를 부러뜨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심히 시집살이를 가혹하게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면 사랑하고 다정하게 대할 것 같지마는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집살이 심하게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얻으면 더 무섭게 시집살이를 시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위선적인 죄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이 범죄할 때 용서 없이 사정없이 짓밟고 정제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정제하던 모세의 제자들은 모두다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이웃을 용서할 때 비로소 나도 위선에서 벗어나서 용서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로 35절에 보면 임금님과 신하의 빚 청산 얘기가 나옵니다. 한 임금님이 신하들을 불러서 빚 청산을 하는데 그 가운데 일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면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백억 가까이 됩니다. "너 백억 원을 빨리 갚으라." "돈이 없어 못 갚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 사람도 팔고 처자를 팔고 있는 것 다 팔아서 갚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만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울면서 임금님이여 시간만 주면 내가 뼈가 으스러지도록 벌어서 갚겠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백 억을 갚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만 용서해 주고 그 빚도 다 탕감해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임금님의 궁에서 나와서 자기 동료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이 백 데나리온은 오늘날 백 오십 만 원 정도 됩니다. 이 동관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야, 이놈아 빚 갚아라. 내 돈 백 오십 만 원 갚아라.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여보게. 시간을 좀 주게. 말미를 주면 갚겠네." "무슨 잔소리냐. 당장 갚지 않으면 널 고소해서 감옥에 넣겠다." 곧장 고소해서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것을 본 동료들이 너무나 안됐어 서 임금님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임금님이 듣자 노발대발해서 이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앞에 꿇어앉히고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네가 사정하기에 내가 너에게 백 억에 가까운 돈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마땅히 나가서 불과 백 오십만 원을 빚 진 동료를 용서하고 탕감해 주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기 부하에게 말하기를 "이놈을 잡아 감옥에 넣어서 이 돈을 갚을 때까지 고통을 더하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너희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간담이 서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마음의 고통, 가정의 문제, 육체의 질병, 생활의 어려움 등이 혹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당하는 심판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병 낫기 위해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죄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혹시 우리가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병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지 않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는 반드시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 혐의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해야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도 너희 죄를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남편을 용서해 주고 있는가? 아내를 용서해 주고 있는가? 부모를 용서하고 자식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해 주고 있는가? 이 사실을 깊이 뉘우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내 죄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사하여 줄 때 우리의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용서는 여러분과 나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셋째로,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한 번 살펴봅시다.
용서해 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주여 이웃이 내게 범죄 하면 내가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베드로 생각하기를 일곱 번이면 최대로 용서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하기를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성경 말씀은 단순한 말씀 같지만 그러나 이 예수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기 위해서는 4천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승리하셔야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그 자리에서 멸망시켜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서 가죽을 벗겨서 옷을 해 입혔습니다. 여기로부터 시작해서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기 위해서 누가 와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의로운 의복이 되어 입혀 줄 것을 주님은 예시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구약 4천 년 동안 수많은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서 사람들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은 장차 그 피 흘린 제사를 대표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 하신 것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다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좇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30년의 세월을 성장하시고 마지막 3년 동안 아버지의 뜻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고 난 다음 우리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자원해서 십자가를 택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로마 사람이 잡은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이 넘겨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원했기 때문에 자기 몸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당신이 죄를 짊어진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 죄를 짊어진다면 한 사람도 살아 남을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를 청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류의 모든 빚을 다 갚고도 주님은 능히 여유가 있고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만은 죗값으로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은 밝히 말씀하시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어린양같이 그릇 행하여 각지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죄악을 저에게 여러분의 추악을 저에게 여러분의 불의를 저에게 주님께서 담당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렸습니다. 그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12시까지 고난 당하고 난 다음에 온 천지가 캄캄해졌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오후 3시까지 피를 흘리셨습니다. 온 몸에 피와 물이 다 흘러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전율했습니다. 그 심장이 터졌습니다. 그는 창을 받아 물과 피를 심장에서 다 쏟았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분과 나의 죄악을 다 청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쳤을 때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합쳐서 모두다 청산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님을 통해서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마다 구원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는 벌써 2천 년 전에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용서가 우리에게 효과를 발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용서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주께서 2천 년 전에 이미 용서를 선포했지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짓밟아버리고 용서를 발길로 차 버리고 용서의 힘을 빼앗고 외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용서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용서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이신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사람에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를 주님께서 용서하여 주셔서 일생의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처럼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당당한 의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의 용서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버지도 함께 그 마음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복음전도자 고리템블 여사는 독일 나찌 수용소에서 갖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잡혀가서 부모도 다 나찌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동생과 함께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을 동안에 중노동에 시달리고 영양실조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 못 견딜 것은 독일 병사가 자기 여형제 둘을 불러다 놓고 발가벗겨서 많은 사람 앞에 수치와 곤욕을 겪게 하고 온갖 모욕을 다 주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모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견뎠는데 해방이 되기 전에 그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도 거의 가사상태에서 해방되어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복음전도자가 되어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독일의 어느 지역에 가서 하루 성회를 인도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에 회개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오는데 거기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의 신사 한 사람이 나오는데 보니까 바로 나찌 수용소에서 자기와 자기 동생을 발가벗겨 놓고 갖은 가혹을 다 했던 바로 그 독일 병사가 자기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고리템불 여사의 그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온 심장에 피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그의 기억은 나찌 수용소로 돌아갔습니다. 무서운 나찌의 복장을 입은 그 독일 병사가 자기와 자기 여동생을 대중 앞에서 발가벗겨 놓고 온갖 곤욕과 모욕을 다하던 이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그는 몸서리쳤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함을 치고 뛰쳐나오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 나가서 그의 멱살을 잡아서 끌어당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고함을 쳤습니다. '주님이시여,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내 동생을 죽였고 나를 가혹하기 취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 고리템블 여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리템블, 나는 나를 욕하고 나를 발길로 차고 내게 침뱉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졌다. 내가 지어서 내가 먹이고 입히고 살려준 백성이 나를 배반했지만 나를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다. 나찌 수용소에서 너를 발가벗기고 너에게 모욕을 가하고 너에게 고통을 가한 이 사람이지만 오늘은 네가 이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져라. 이것이 나의 복음이다. 용서해 주는 것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걸머지지 않고는 용서해 줄 수가 없다. 용서받는 사람이 십자가를 걸머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는 사람이 십자가를 걸머져야 용서해 줄 수가 있다. 너는 정말 이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 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결코 이 사람을 용서해 줄 수가 없다.' 고리템블 여사는 거기서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주여, 날 위하여 십자가를 걸머지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온갖 죄와 누명을 덮어쓰고 십자가를 짊어질 때 내 현재 겪는 이 고통의 억천 만 배를 겪으셨지 않습니까? 주여, 나도 십자가를 걸머집니다.' 그래서 이 독일 사람이 나왔을 때 그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형제여, 나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형제를 위해서 나는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이 축복을 허락해주도록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이 흘렀지만 그 온 몸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치 태평양의 바다 물결이 파도처럼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혈관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길같이 타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용서가 무엇이라는 것을 자신은 진실로 깨달아 알았다는 간증을 적은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걸머지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를 입고 내가 욕을 당하고 내가 짓밟히고 내가 손해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에게 가혹 행위를 행한 그 사람을 용서해 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걸머지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쉽게 죄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사함을 주는 것은 값없이 우리가 받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값없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함을 주기 위해서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 아들 예수를 이 땅에 흔쾌히 내놓았다는 것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그것도 온 세상의 죄를 다 덮어쓰고 끝없는 누명을 당신이 다 가슴에 안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를 못 박고 난 다음 사람들은 그에게 침뱉고 고개를 흔들며 모욕했습니다. "성전을 짓고 사흘에 짓는 자여, 성전을 짓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이 하는 것을 스스로 모르고 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무서운 고통과 대가를 지불했으므로 여러분과 나는 오늘 값없이 나와서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용서받고 구원받은 우리들을 이제 용서해 줄 의무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남편을 용서하십시오. 아내를 용서하십시오. 자녀를 부모를 용서하십시오. 이웃을 용서하십시오. 자기를 용서하십시오. 용서 속에 치료의 강물이 흐르고 치료한 곳에 재생과 사랑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 기 도 -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불완전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용서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용서 함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내 자신도 용서하고 내 부모, 형제, 이웃을 용서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힘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성령으로 도와 주셔서 우리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이웃을 용서해서 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치료가 하나님 보좌로부터 넘쳐 나온 것처럼 우리의 용서를 통해서 넘쳐 나와 우리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재생의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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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용서
by 삶의언어 posted Oct 22, 2024 Views 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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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 전도/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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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린 날 | 1987-10-25 |
오늘의 성구 | 마태복음 6장 12절로 15절 말씀 |
설교영상 관련 설명 |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