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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by 삶의언어 posted Apr 27, 2024 Views 1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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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하나님/하나님 나라
예배드린 날 2004-12-19
오늘의 성구 시편 31편 19~21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EdDOZVifplg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시편 31편 19~21절 말씀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편의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되 내 편한대로 내 중심에서 적당히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무시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세상과 마귀와 탐욕과 타협해서 믿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욕되게 되고 불신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또 하나님의 축복에서도 멀어지고 많은 시험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으로 다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 좋은 하나님보다 이전에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으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본론]
1.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시작되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 감히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을리가 없습니다. 아담은 탐욕을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욕심내는 것을 먼저 취했습니다. 자기 욕심부터 먼저 취하니까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그냥 따먹고 하나님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 그런 일 못합니다.
야고보고서 1장 14절로 15절에도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아담의 교만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했으면 감히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될려고 합니까? 그러나 마귀의 말을 믿고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말을 믿음으로 하나님처럼 섬김을 받겠다고 교만하게 나옴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를 들고 “날 좀 보십시오. 나를 섬기십시오.”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죽기는 뭘 죽겠어? 안 죽을 거야.”라고 하나님 말씀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신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탐욕을 앞세우고 교만을 앞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우리가 불순종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한다고 다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우리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도 그렇지 않아요? 자녀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해야 가정에 질서가 서고 교육이 섭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좋습니다. 아버지를 좋은 하나님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두려워해야 아버지를 공경하고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에 아버지의 명이 서지 아니하면 자녀들 교육을 할 수 없잖아요. 두려움이 우리의 모든 삶의 근원이 되어야 질서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을 두려워하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두려워했습니까? 벌거벗은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창세기 3장 8절로 10절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벌거벗게 되므로 벗은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벗은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한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으면 자기 양심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 보혈로 씻고 깨끗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회개하고 보혈로 씻지 않은 사람은 양심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도서 1장 15절에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했습니다.
양심이 더러워지니까 양심을 자꾸 피하려고 하지요. 사람들은 모두 다 감추인 죄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고 자기만 아는 죄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죄가 들추어질까 싶어 두려워합니다.
오래전 영국에서 한 기자가 당시 유명 인사들에게 “당신의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 때까지 이 도시를 떠나서 계십시오.”하는 장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한참 있다가 다시 그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한 사람도 없이 다 도망을 쳐버렸더랍니다. 왜냐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편지를 받은 유명인사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비밀이 드러난 것이 두려워 줄행랑을 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죄로 벌거벗은 양심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보혈로 씻은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감추어 놓은 죄 때문에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자꾸 덮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마귀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내 맘대로 산다.” 그렇지 않아요. 세상을 두려워하고 마귀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사주팔자나 토종비결을 봅니다. 이제 2004년도가 지나가고 2005년도가 다가오니 내일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토종비결을 보거나 사주팔자를 보거나 점을 칩니다. 점을 치는 사람들 마음에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면 하나님께 의지하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장사밑천으로 삼아 돈벌이는 하는 사람이 바로 사주팔자 보는 사람이나 토종비결을 보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내게 인터넷 편지가 왔어요. 한 젊은이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자기는 그해 토종비결을 보고 난 다음에 인생을 망쳤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 문제를 위해서 목사님과 상의하기 위해서 인터넷 편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연초에 사주팔자를 봤는데 올해는 물을 조심하시오. 그렇게 나왔습니다. 안 들은 것보다 못합니다. 그는 일류회사에 나가는 직원이었는데 회사일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과 대서양 바닷물을 건너갈 때가 많습니다. 그해 토정비결에 물을 조심하라고 했기 때문에 상부에서 해외출장 가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난 출장 못갑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죄로 그해 승진에 누락되었습니다. 동료들은 승진하는데 자기는 승진 못 했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는데 여름에 애인이 자꾸 바다에 놀러 가자고 합니다. “우리도 해수욕도 하고 물가에 놀러가자”고 하는데 “사주팔자에 올해는 물을 조심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 말은 못하고 난 물 좋아하지 않으니까 안 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애인이 “나를 사랑하면 내가 물을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은 다 해수욕도 가는데 나와 같이 바다 해수욕도 한번 같이 못 가느냐?” “나는 못 간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둘이 크게 싸우고 그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도 승진하지 못하고 그 물 때문에 애인도 잃어버리고 우울증이 생겨 살아갈 욕망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살하려고 물속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신고를 해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그 연락을 받고 헐레벌떡 뛰어온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하는 말이 “야 이놈아! 올해는 물 조심하라고 했는데 왜 물에 뛰어들고 그러냐?” 물 때문에 망했습니다. 사주팔자, 토종비결 안 봤으면 승진도 하고 애인도 데리고 있고 마음에 우울증과 절망도 느끼지 아니했을 것인데 왜 사주팔자, 토종비결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 안했기 때문에 세상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병과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병들어도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기도하고 혹은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고 부르짖어서 능히 암도 관절염도 흉한 질병도 다 이기고 나옵니다. 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이 오면 “아 나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병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병이 오면 병을 두려워해서 병 앞에 벌벌 떨지 않습니까? 두려움이 우리에게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신명기 28장 60절로 61절에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에 두려워하는 질병과 고통이 퍼부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명기 28장 58절로 59절에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보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병을 두려워하게 되고 재앙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저주와 가난을 두려워하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오니까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컹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삽니다. 얼마나 아담이 하와의 손을 잡고 떠나온 에덴을 멀리서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거기에 있을 때는 가난하지 않고 헐벗고 굶주리지 아니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 살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렇게 고통 속에 사는구나! 왜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가난과 저주를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겠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자기는 곤고하게 되고 가련하게 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게 되는 그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안 돌봐 주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친아버지신데 아버지를 공경하고 사랑하고 의지하는데 아버지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들을 안 돌봐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무정한 아버지가 어디가 있습니까?
성경에는 너희의 아버지, 세상에 악한 아버지도 자식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 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죽음과 지옥을 두려워합니다. 오늘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안 그런 척 하지만 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저 건너편에 지옥을 두려워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죽음과 지옥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과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데 죽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두려움을 안겨 주기 때문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패니슨 교수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왜 죽음이 두려우냐.
첫째로, 죽은 이후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고 난 다음 어디로 가느냐. 모르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가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비 된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다가올 죽음 저 건너편의 세계를 알기 때문에 안 두려워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저 건너편의 세계를 모릅니다. 미지의 세계를 들어가니까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로부터 고립되는 두려움입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혼자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된다. 혼자 있다는 것 얼마나 괴로운 것입니까?
또 셋째로, 가족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헤어진다.
제가 폐병으로 앓아 드러누워 있을 때 병원에서는 저는 6개월 내지 1년 이내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방에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밤이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마음속에 스며들어 옵니다. “야! 내가 죽으면 상여에 실려서 저 공동묘지에 가서 홀로 땅속에 들어가겠구나! 땅을 파고 내 관을 내려놓고 삽으로 흙을 덮는구나!” 흙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난 다음 내 친지들은 몇 포기의 꽃을 놓고 떠나가 버리고 나는 외로이 산속에 땅속에 묻혀서 기나긴 영문을 어떻게 지날꼬?“ 죽은 사람이 땅속에 들어가서 어떻게 지낼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나 살아있을 동안에 죽음을 생각하면 그것이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나는 외롭게 가족과 친지를 떠나 영원히 홀로 땅속에 고독하고 외롭게 있겠구나!“ 굉장히 두렵습니다.
넷째로, 자기 육체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입니다. 오랫동안 육체 속에 살았는데 내 육체가 없어지고 나는 공중에 뜨게 되니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두렵지요.
다섯째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을 때 그냥 죽겠느냐? 얼마나 숨이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다가올 것이 아니냐. 여기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섯째로,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 왔던가하는 주체성 상실의 두려움입니다. ”야~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느냐? 여태까지 살아온 것이 일장춘몽이구나! 무엇 때문에 살았느냐?“ 허무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병들어 어린애처럼 될지 모른다는 퇴행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을 때 치매에 걸려서 아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고 대소변 가리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이와같이 죽음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천국 낙원으로 들어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스위스의 법학자이며 철학자인 힐티는 현대인이 고난을 무서워하는 원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인 고난공포증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마음은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채워집니다. 마음이란 그릇 속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채워지던지, 세상의 두려움으로 채워지던지 둘 중에 하나로 채워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말할 때 오만가지 걱정을 다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오만가지 걱정이란 무슨 말이냐. 진짜로 오만개의 걱정이란 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만개의 걱정이 매일같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걱정이 5만개나 다가오니까 그 걱정을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5만개 아니라 10만개의 걱정이 다가와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만가지 걱정 안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품에 편안히 의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초적인 두려움이 안 믿는 사람의 가슴속에는 있어요. 미국에 유명한 인생철학자 나폴레옹 힐은 인간이 마음에 평화를 얻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7가지 두려움을 버려야한다 했습니다. 7가지 두려움을 버려야 평안과 행복과 균형 잡힌 인생을 산다. 첫째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된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나요? 둘째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된다. 셋째는 허약한 건강과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없어야 된다. 넷째는 사랑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된다. 다섯째는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되고 여섯째는 연령에 늙어 가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되고 일곱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마음이 안정되고 발란스가 잡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여러분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 비판에 대한 두려움, 허약한 건강과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사랑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나이 늙어 가는 데 대한 두려움, 죽음에 두려움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두려움을 극복합니까? 이것은 인간이 태어나고 난 다음 원초적으로 우리에게 다 다가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우리가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 이 모든 두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평화와 행복과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이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바로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바로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원래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 앞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두려워하고 당신의 말을 듣고 떠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한 모세는 애굽의 바로왕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3편 5절로 6절에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품에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홍해와 광야를 두려워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니까 3백만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홍해가에 와서도 건너갈 배도 다리도 없고 애굽의 전차 군단이 뒤에서 습격해 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편이란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한말을 들어보세요.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니까 애굽의 마병과 군마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면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명기 7장 18절로 21절 다같이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크고 두려운 하나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원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겠느냐? 세상을 두려워하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우리가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고 믿으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왔을 때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택하여서 가난 복지를 40일 동안 정탐하고 오라고 했는데 그 중 열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없이 그대로 걸어가서 보니 유대광야가 얼마나 광막한 광야입니까? 주민을 삼키는 광야입니다. 가나안 칠족이 있는 성은 너무나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보입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를 보았는데 그들의 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같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세상의 두려움이 그들을 휘어잡았습니다. 그들은 진으로 돌아와서 백성들에게 그 땅은 주민을 삼키는 광야더라. 성은 높고 거인이 있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절대로 못 들어간다. 우리 처자가 사로잡힐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를 보았습니다. 높은 성을 보고 거인들을 보았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민수기 14장 9절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면 원수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9절로 21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은 많은 은택을 쌓아 놓았었습니다.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서 쌓아 놓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축복이 얼마나 큽니까?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나 하나님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와 동등으로 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뱅겔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독일의 초대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리고 그 밖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크시고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시면 세상에 어떤 것도 여러분을 두렵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참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시작된다
참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김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떨고 섬기는 것이 출발점인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고 믿고 떨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면 아버지 말씀을 듣고 떨게 되는 것이요,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면 아버지가 말하면 ‘피식~’ 웃고 마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존경심이 없습니다.
이사야 8장 13절에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놀랄 자를 삼으라.
출애굽기 14장 31절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의료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빗 리빙스톤이 1856년 아프리카에서 큰 위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자신을 헤치려던 음부루마라는 원주민 추장의 땅을 통과해야 되겠는데 그 추장에게 걸리면 별수 없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태복음 28장 18절로 20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리빙스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떨던 사람이었었습니다. 그 말씀에는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읽고 리빙스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고 이 말씀을 받아서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1856년 1월 14일 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에게 불안과 두려움의 종식을 의미한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지금도 예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 나는 평안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을 두려워 떨며 받아 들였기 때문에 그는 아프리카의 추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그는 믿음으로 그 땅을 통과했고 아프리카 추장도 리빙스톤을 두려워해서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두려움 없이 아프리카 선교를 계속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누굽니까?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이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실한 사랑은 존경과 경외심에서 나옵니다. 남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로맨틱해서 사랑한다. 로맨스 로맨스 그러지만 로맨스 며칠 안갑니다. 존경해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존경해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계속 술이나 먹고 도박이나 하고 음란하고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리가 있어요? 존경하지 않습니다. “저 개떡같은 인생이라”고 존경 안하지요. 남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존경안하고 사랑안합니다. 사랑이란 것은 두려워하고 존경하는데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내도 그래요. 아내가 생활을 참 규모있게 하고 자식들 잘 기르고 바로 살림을 잘하면 남편이 아내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참 올바른 사람이다. 정직하게 살고 규모있게 살고 참으로 존경할 사람이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합니다. 아내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므로 사랑하지. 우리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의 지도자를 우리가 두려워해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면 사랑하게 되는데 세상의 지도자들보고 “아이구! 지나 내나 별 도리 없다. 어쩌다가 지도자가 되어서 그렇지 뭘 잘 하는게 뭐냐?” 두려워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지요. 막말을 하지요. 그러나 참으로 지도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면 사랑하게 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존경과 경외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그냥 “주여 사랑합니다. 주여 사랑합니다.” 백번 말해봤자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으면 그 사랑은 거짓사랑입니다. 엉터리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의 대황제 콘스탄티누스 그는 로마에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 왕관을 벗고 앉아서 설교를 안들었어요. 대제국의 왕인데 설교를 서서 들었습니다. 왜 왕관을 벗고 서서 듣냐.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대주재 하나님 앞에서 감히 내가 어떻게 왕관을 쓸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앉아서 듣겠느냐. 서서 들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로마의 대왕이었기 때문에 그가 주 300여년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선포한 것입니다.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전체가 복음화되고 세계기독교가 빛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그처럼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헌신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헌신합니까? 아버지를 두려워하면 집에서 장난 못치지요. 집에 물건 훔치고 아버지 주머니나 뒤지고 집에 있는 신발은 엿장수에게 팔아먹고 그런 것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면 절대로 못합니다.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면 집에서 마음대로 행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방탕하며 살겠습니까? 아버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가 경거망동하지 않잖아요.
베드로전서 1장 16절로 17절에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아버지를 두려워함으로 지내면 우리가 세속화 되지 않고 마귀의 종이 되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언제나 회개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사람이니까 죄를 안 지을 수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죄를 짓고서는 떨게 됩니다. 곧 회개하게 돼요. 돌이키게 돼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회개하지 않아요. 돌이키지 않아요.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흐트러진 발걸음을 도로 바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헌신하는 지도자를 선별하는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선별하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8장 21절로 22절에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백성을 지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래야 공평무사하게 백성들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족이 왜 축복받았습니까? 고넬료의 온 가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섬기고 구제를 많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보내어서 구원을 하고 성령을 받게 해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넷째로, 믿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가 두려워서 섬기면 진짜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 우주의 주인이 되시고 우주를 다스리는 그 위대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믿을 수 있지요. 역사를 만드시고 역사의 주인이 되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섭리를 믿게 됩니다. 인생을 지으시고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인생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하나님께 경배하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나님을 믿게 되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믿지 않아요. 그리고 순종도 안 해요. 그러므로 반드시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의 신앙고백을 보십시오.
시편 27편 1절로 3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서 주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둘러 진 쳐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다섯째로 진실한 경배와 찬양과 예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생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진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 미국에 부흥회를 다니고 미국교회와 미국가정에서 가정예배도 많이 보다가 좋은 것도 많이 배웠지만 아주 고약한 것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처음 미국가니까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에 와서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와 가지고서 다리를 쭉 뻗고 드러누워서 설교 듣는 사람, 옆으로 누워서 설교 듣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가정예배를 갔는데 찬송부르는데 다리를 쭉 뻗고 누워서 찬송 부르고 있어요. 다리를 걸상위에 얹어놓고서 찬송을 부릅니다. 제일 처음에는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아버님 앞에서 감히 두 다리 뻗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겁이 나니까. 아버님 앞에서 어디 걸상에 다리 얹어놓고 비스듬히 누워서 이야기 합니까? 아버님이 오시면 우리가 정좌를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아버지와 대화하지요. 그런데 미국에 가보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완전히 자유방임으로 살더라구요. 제일 처음에는 내가 굉장히 고약하다. 행실이 참 없구나. 정말 예의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자주 가니까 미국이 우리보다 선진국이고 기독교도 먼저 받았으니까 하나님을 이렇게 믿어도 되는구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도 그만 찬송 부르는데 드러누워서 찬송도 부르고 다리를 걸상에 얹어가지고 편안하게 찬송도 부르고 그렇게 했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경외함이 없어지고 점점 어떤 생각이 드냐면 ‘너나 나나. 하나님이나 나나 뭐. 똑같지 않느냐?’ 방종한 신앙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겁나는 것이 없어요.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시험과 환난과 고통 속에 떨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예배가 된다.
미국에 많은 교회 목사님들이 교회 올라오는데 신던 운동화 그대로 신고 넥타이도 안 매고 그냥 허름한 옷 그대로 옷 입고서 설교하러 올라옵니다. “야~ 정말 자유롭고 편안하게 예배드리는구나!” 이제 보니까 고약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망나니에요. 대통령 만나러 가는데 운동화 신고 넥타이도 안 매고 반팔로 가겠어요?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 나오는데 그렇게 나가겠어요? 옷이 없으면 있는 대로 최고의 좋은 옷을 집에서 입고 구겨진 넥타이라도 다려서 매고 그리고 단정하게 나가야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면 경외하는 태도를 언어, 심사, 행동에도 나타내야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경외와 찬양과 예배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23절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하라 했습니다. 찬송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찾는 찬송이고 예배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2편 11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을 떨면서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두려워서 덜덜 떨면서도 너무나 좋은 하나님, 우리 친아버지 그리고 즐거워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두려움과 함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9편 3절에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두려운 이름을 두려워하면서 찬송을 하라. 예배도 두려움과 더불어 찬송도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자식이 부모를 두려워해야 존경심이 사랑도 생기고, 순종도 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시절에는 선생님이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감히 선생님 뒤에 그림자도 못 밟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두려워했으므로 존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선생님을 사랑하고 오늘날도 선생님이 끼친 영향력이 가슴속에 길이길이 남아있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을 두려워해야 존경하고 순종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고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오늘날은 학생이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직업적으로 와서 가르치는 하나의 셀러리맨이다. 뭘 두려워할 것 있느냐?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선생을 존경도 아니하고, 순종도 아니하고, 사랑도 안합니다. 조금만 꾸짖으면 반항하고 체벌하면 핸드폰 들어서 경찰에 고발하고 부모 데리고 와서 난장판하고 그러니까 선생들은 삯꾼이 되고 배우거나 말거나 내가 생각할게 뭐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동교육에 가장 근본은 도덕이 근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도덕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지혜로운 망나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돼요. 집에서는 부모를 두려워해야 되고 학교에는 스승을 두려워해야 되고 사회는 선배를 두려워하여 공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질서가 서게 되고 사랑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이용가치로만 생각하고 자기와 동등으로 여기며 두려워 떨지 않는 신앙은 결국 탐욕과 교만과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떨어져서 나중에는 파멸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가장 기초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한 가정이 온전한 가정이 되려면 아내는 남편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므로 사랑하게 되고 남편도 아내를 두려워하므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은 육체적인 로맨스로써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존경은 언제나 사랑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데 존경 안 할 수 없고, 존경해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존경할 때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고 하나님을 희생적으로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크시고 두려워하는 분으로 우리가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우리와 동등으로 생각하고 욕심을 하나님보다 앞세우고 교만을 하나님보다 앞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잘못된 신앙을 하지 않게 도와주시옵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므로 무릎을 꿇게 도와주시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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