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자기를 비워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조그마한 탐욕이 있으면 쉽게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길을 가게 됩니다. 진정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면 단호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양손에 쥐고서 둘 다 취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양수집병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양손에 떡 하나씩을 쥐고 이 떡을 먹을까? 저 떡을 먹을까 주저하다가 둘 다 놓치고 만다는 말입니다. 또한 상하사불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랫 절에 가서 밥을 얻어먹을까? 윗 절에 가서 얻어 먹을까하고 갈팡질팡하다가 나중에는 끼니때를 놓쳐서 어디에 가도 밥을 못 얻어 먹고 만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한발 두고 하나님 나라에 한발 두고 내가 기회를 따라서 세상으로 갔다가 하나님으로 갔다가 하면 모든 곳에 다 실패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얻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야 조금씩 자기를 비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탐욕과 시련과 순종의 과정을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론]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그는 평범한 시골 노인이요, 목축을 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왔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아브라함의 사생활은 유대인들이 읽은 탈무드에 조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랍비 마틴 톨게이트가 탈무드에 쓴 글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에 갈대아우르는 다른 신 숭배지역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외출한 어느 날 아브라함이 우상을 다 부수고 가장 큰 우상 손에 도끼를 쥐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세상에 내가 섬기는 우상들을 이렇게 네가 다 부술 줄 몰랐다.” “아니오. 내가 부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우상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여 밥을 지어 주었더니 큰 우상이 혼자 먹으려고 도끼를 들고 다른 우상을 다 때려 부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는 말이 “야 이 사람아! 우상이 어떻게 생명도 없는데 도끼를 들고 다른 우상을 다 부숴 버린단 말인가?”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데라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말이 옳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한 말을 아버지가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 아브라함이라고 탈무드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75세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지요.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졌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큰 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꿈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어요. 꿈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삶을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취하기 위해서는 네가 가지고 있는 삶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세상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됩니다. 세상도 취하고 하나님도 취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로 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라고 불렀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젊은 나이에 철학, 신학, 의학 세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도록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음악에 뛰어나서 바하에 대해서는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30세에 이미 슈트라스브르그 대학의 신학부장으로 초청되어 고액의 연봉과 멋진 주택을 받고 오르간 연주자로써도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학시절에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있었습니다. “문명지대를 떠나서 가난하고 외롭고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헌신하라!” 그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를 준비하기 위해 무려 8년간 의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보장된 미래를 단연히 버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복음전도, 진료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가장 열악한 아프리카, 말라리아가 들끓고 도마뱀, 사나운 짐승들이 들끓는 곳에 가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다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총명하고 지혜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결정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세상을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고 많은 사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나중에 그는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삶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버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꿈과 뜻을 이룬 것입니다.
2. 자기를 비우지 않은 순종
둘째로, 우리가 볼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순종해서 나가되 자기를 비우지 않고 그대로 순종해서 나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은 순종. 이것은 큰 시련을 이미 기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전부 수레에 싣고 종들을 데리고 아비집인 조카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내면적으로는 고향산천을 떠난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고향산천을 모두 다 데리고 갔습니다. 고향 산천에 있던 종들을 다 버리고 아비 집을 떠나라 했는데 조카를 데리고 그리고 재산을 다 청산해서 수레에 싣고 대 행렬을 지으면서 떠났습니다. 아마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서 내려다보시고 탄식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 아내 사라의 손만 잡고 떠나라고 했는데 저게 뭐냐, 전부 갈대아우르에서 얻은 것을 다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냐?” 아브라함은 자신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순종해서 따라간다고 하지만 그는 자기를 비우지 않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대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산천초목이 불타고 물이 다 말라 버리고 짐승 떼는 먹을 풀이 없어서 다 말라죽고 굶어죽고 종들은 배가 고프니 뿔뿔이 다 헤어지고 일가친척들도 다 떠났습니다. 데리고 온 세상을 비우게 하려고 하나님이 대 기근을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보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기근이 심하니까 따라온 종들도 일가친척도 다 떠나가 버리고 짐승들은 다 굶어 죽어 버립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와 조카 롯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종종 말합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다가옵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왜 이 고난이 다가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한 것은 가상스러운 일이지만 세상을 다 짊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쫓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등에 짊어진 세상 짐을 풀어 놓아라. 그러기 위해서 시험과 환난을 보낸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요사이 도시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체험하지 못한 많은 체험을 합니다. 시골에 어른들이 늘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시골에 불이나서 마굿간에 불이 활활타면 소를 끄집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불이 확 타서 온 천지가 환할 때 뛰어 들어가서 소를 끌러서 아무리 잡아 당겨도 소는 안 나옵니다. 뒷걸음질 칩니다. 천하장사도 불이 난 마굿간에 소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소를 끌어냅니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소 여물통을 뒤엎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소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면 소가 순순히 따라 나옵니다. 왜요? 여물통이 뒤엎어지는 것 보니까 “내가 있을 곳이 아니로구나! 이곳은 내가 떠나야 하겠다.” 그러므로 소 마굿간에 불이나면 무조건하고 소를 끌어내려고 하지 말고 여물통부터 먼저 뒤엎어라! 그것이 시골 사람이 늘 하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 여물통을 뒤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 근심하는 우리 삶의 근원을 하나님이 뒤엎어 버립니다. 우리 사람들도 여물통이 뒤 엎어지면 따라 나옵니다. 내가 먹고 마시고 발붙일 곳이 있으면 끝까지 버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밥통을 엎으시면 그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온다고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순종시키려고 큰 재난을 보내셨습니다. 기근이 다가와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니까 그쯤 되면 아브라함이 손들고 나올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라는 혈육의 애착 즉, 그 탐욕을 놓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생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 그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그가 친 자식처럼 키우는데 자기는 자식이 없지 않습니까? 그 롯이 자기와 같이 따라 나오는데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는데 아비 집을 품에 끼고 있습니다. 결국 애굽에 내려간 것도 롯 때문에 내려간 것입니다. 롯이 밥 달라고 통곡을 하고 우니까 아브라함이 도저히 마음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롯의 애착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 길로 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은 탐욕이요, 우상인 것입니다. 그는 롯이 탐욕이 되었고 롯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시편 119편 36절에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그런 기도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도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롯에게는 자기 조카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탐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배고프다고 우니까 그를 끼고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했지 애굽으로 가라는 말은 안했습니다. 기근이 다가왔더라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통곡하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돌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까 이제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인가 나의 뜻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나를 비워 버리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내가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내 애착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 한분이 여행을 하다가 숲을 지나게 되었는데 숲에 길이 두 개 나있었는데 할머니는 어디로 갈지 몰라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중앙에 놓고 쓰러뜨릴 때 지팡이가 왼쪽으로 쓰러지면 왼쪽으로 가겠고 오른쪽으로 쓰러지면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할머니 속으로는 왼쪽으로 가겠다고 이미 결정을 했어요. 그래서 지팡이를 탁 드니까 지팡이가 오른쪽으로 탁 넘어지거든. “이것 하나님 실수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또 지팡이를 세워놓고 탁 하니까 또 오른쪽으로 탁 넘어지거든 그러니까 “이것은 우연히 오른쪽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아버지 뜻이 나타나 주시옵소서.” 세 번째 해서 탁 쓰러지니까 왼쪽으로 탁 쓰러지니까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의 뜻이 왼쪽으로 가라는 것이지.” 자기탐욕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지팡이를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왼쪽으로 좋다고 따라갔는데 길이 넓고 좋아서 갔으나 얼마있지 아니하여 길이 끊어지고 늪이 앞에 섰습니다. 도저히 건너갈 수 없어요. 그는 실망하고 다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이미 뜻을 정해놓고 난 다음에 하나님 뜻을 보여 주시옵소서. 헛된 일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마음에 뜻을 정했습니다. 조카를 살리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정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자기 길로 가는 아브라함
셋째로, 자기 길로 가는 아브라함을 우리가 보십시다.
조카 때문에 애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므로 그는 믿음도 잃어 버렸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등을 돌렸으니 이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도 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냥 조카 롯을 데리고 자기 아내 사라를 데리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아야지요. 우리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으면 하나님을 믿고 기적을 기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의 짐을 지어 주시고 우리 일을 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기적을 기대할 수 있는데 이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애착인 조카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판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보고 “여보 당신은 너무나 이쁘다. 틀림없이 애굽에 내려가면 사람들이 당신이 내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다오. 지금부터는 애굽에 내려가니까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당신이 나를 오빠라고 불러다오. 나도 당신을 동생이라고 부를 테니까. 우리 형제같이 행동하고 부부같이 행동하지 말자.”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는 이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1절로 13절에 보면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이 사라가 보통 이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10살이 아래니까 아브라함이 75살에 부름을 받았는데 사라는 그때가 65살이었는데 65살 되는 할머니가 눈이 부시도록 이뻤습니다. 그러니 참 놀랄만하지 않습니까? 65살되는 할머니를 데리고 가면서 누가 빼앗을까 싶어서 겁을 내는 것입니다. 요사이 그런 일이 별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가서 가는 곳마다 65살먹은 할머니 사라가 75살 먹은 아브라함을 보고 “오빠. 오빠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기에는 다 형제간이라. 그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가나안에서 허수룩한 농부 한사람이 왔는데 절세미인을 데리고 내려왔다. 얼마나 소문이 났기에 바로왕의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바로왕이 “데리고 들어오너라.” 두 사람이 바로의 궁에 들어가니 “너희들은 누구냐?” 아브라함이 “나는 고향을 떠나서 방랑하는 객인데 내 동생 사라를 데리고 다닙니다.” “동생이냐?” “예 동생입니다.” 사라보고 “진정코 동생이렸다?” “예~ 우리 오빠입니다.” “그러면 좋다. 나하고 결혼하자! 이렇게 절세미인을 내가 본적이 없으니 이 웬일이냐?” 그래서 사라를 받아들여서 성대하게 의식을 집행하고 바로가 아내로 맞이하고 말은 것입니다. 세상에 조카 롯 하나 때문에 하나님 뜻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나와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다가 아내를 바로에게 시집보내고 말았습니다.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내를 시집을 보내고 그 다음에는 “처남 이리 오너라! 아~ 처남 참 고맙다.” 그러고 난 다음에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소도주고, 말도주고, 짐승도 주고, 금과 은을 잔뜩 주었습니다. 마누라 시집보내고 부자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법도 희안한 법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일생에 씻을 수 없는 치욕입니다. 그런 치욕이 어디 있습니까?
창세기 12장 19절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이것은 바로가 사라를 취하여 아내로 삼고 난 다음 대 재앙이 내려왔습니다. 온 집안에 재앙과 환난이 덮쳤습니다. 마치 소나기가 오듯이 큰 해일이 오듯이 온 가정에 풍파가 다가오니 조사를 해보니까 이 사라가 들어온 때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누구냐. 아브라함의 아내다. 그래서 왕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가 왜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을 했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데리고 가거라! 그 대가로 금은보화와 짐승들을 가지고 가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큰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애굽에서 나오는데 여러분 혈육에 대한 정이 그렇게도 끈질긴 것이 본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런 모욕을 당하고 다시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롯을 끼고 돌아왔습니다.
창세기 13장 1절로 2절에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라함이 아내 덕분으로 큰 부자가 되어 나왔지만 그러나 혈육에 대한 정을 버리지 못합니다. 롯도 데리고 함께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만 롯을 보고 “너는 고향땅으로 가라! 나는 더 이상 너를 데리고 갈 수 없다. 하나님 뜻을 거역했다가 내가 얼마나 수치를 당했는가! 이제는 헤어지자!” 그래야 될 것인데 나오면서 “오냐, 오냐! 같이 가자! 죽어도 같이 가고 살아도 같이 살자!” 이것이 정말 무시무시한 탐욕이요, 애착인 것입니다.
4.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시련도 떠나지 않는다.
넷째로, 우리가 여기에 보면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시련도 떠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시련이 떠나지 않는 것은 탐욕 하나 때문에 그 조카를 버리지 못하는 그 탐욕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므로 시련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조카 롯과 이제는 대판 싸우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카 롯도 이제는 일가를 이루고 많은 짐승이 있고 아브라함도 많은 짐승이 있는데 초목은 별로 많지 아니하고 물도 많지 않습니다. 서로 풀을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싸웠습니다. 어린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되지 않습니까? 그들이 와서 아브라함의 종들은 아브라함에게 고발하고 롯의 종들은 롯에게 고발하니 결국 아브라함과 롯이 대단히 맘이 상했습니다. 서로 대결했습니다. 가나안에서 조카 롯과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3장 5절로 7절에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많은 이방민족이 있는 앞에서 그들은 다퉜습니다. 집안이 편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얼굴을 붉히고 롯도 얼굴을 붉혔습니다. 우리 대통령께서도 얼굴을 붉힐만한때는 붉히겠다고 그랬는데 아브라함이 롯을 보면 얼굴을 붉혀서 “네가 어떻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너를 데리고서 애굽까지 갔다가 이곳까지 왔는데 나를 이럴 수 있느냐?” 롯은 롯대로 “삼촌께서 어떻게 나를 이렇게 박대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를 봐서라도 나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서로 얼굴을 붉혔습니다. C.S.루이스라는 위대한 신앙인은 말하기를 “왜 고난이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고난은 이런 인생을 향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확성기”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꾸 자기의 탐욕에 애착을 가지는 것입니다. 큰 고난이 다가오면 비로서 자기 탐욕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니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C.S.루이스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온다고 하면서도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므로 큰 기근을 만나서 모든 종들과 모든 친척들이 다 떠나가고 이 조카 때문에 내가 애굽으로 내려왔다가 마누라까지 잃어버린 큰 치욕을 당했는데 이제 가나안에 올라와서 조카를 끌어안고 있으니 이 재앙이 무슨 재앙이냐. 모든 이방인들 보는 앞에서 조카와 삼촌이 논쟁을 부르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싸우고 또 싸우니 이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결국에 마지막 자기를 비웠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조카에 대한 애착과 탐욕을 비워 버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창세기 13장 8절로 9절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나를 떠나라. 비로소 애착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롯이 떠나간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자기의 욕심이 떠나가고 우상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애착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라. 내가 네게 우선권을 준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로가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로 가겠다. 아브라함이 삼촌으로써 자기가 우선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워 버렸습니다. 이제는 헤어져야 되겠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되겠고 인간의 애착을 떠나 보내야 되겠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롯은 자기 삼촌 앞에서 먼저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요단 뜰을 바라보니 물도 넉넉하고 풀도 많은지라. 애굽 땅과 같습니다. “삼촌 나는 요단 뜰로 가겠습니다.” “오냐~ 먼저 가라!”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제 조카를 떠나보내자 마음속에 모든 탐욕을 다 비워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내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그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조카 롯이 떠나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계시가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7절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보세요. 마지막 탐욕을 저버리니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이 있는 이상은 탐욕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비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속에 탐욕을 저버려야 됩니다. 마지막 탐욕인 롯이 떠나가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탐욕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말씀대신에 하나님은 시험과 환난과 풍파를 보내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탐욕이 깨어지게 만들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비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시험과 환난의 압력이 가해지면 할 수 없어 두 손 들게 됩니다. 내 삶의 밥통이 넘어지고 내 삶에 고통이 다가오면 내가 스스로 탐욕을 벗어 버리고 세상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해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5. 또 다른 탈선
다섯째로 그만하면 되겠는데 아브라함이 또 탈선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치고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되었는가 하면 또 넘어지고 넘어졌는가 하면 또 돌아오고 그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를 떠나보내고서 이제는 완전히 비운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하나 비우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욕망입니다. 이제 나이는 먹어가고 후손이 없으니 그 마음속에 자식에 대한 욕망, 그것이 탐욕이 되고 우상이 되었었습니다. 그가 나이 85세가 되었을 때 이제는 나이는 이렇게 먹었고 아내는 늙었고 자손을 놓을 수가 없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로 6절에 보면 그가 탄식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이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후손이 없으니 우리 집에서 기른 종 엘리에셀이 내 후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다. 네 후사는 네 몸에서 나온다.” 그리고 끌고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게 했습니다. 별들을 잔뜩 바라보고 헤아리니까 하나님이 “이제 그만 헤아리라.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을 칭찬해서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마음속에 자손을 얻겠다는 간절한 탐욕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그 뜻을 받아 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늙어도 아내가 늙어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믿습니다 하고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인간적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믿는 사람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방법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았지만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들어와서는 믿음으로 살아야 되었습니다. 기적을 믿고 살아야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애굽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나와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 거창스러운 약속을 받았으면 믿어야 될 것인데 세상적인 생각이 믿음에서 그를 끌어내렸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당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나갈 것이냐, 세상의 수단과 방법을 따를 것이냐. 그 투쟁 속에서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집에 들어오는데 사라가 “여보, 여보!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신이 이제 85살이요. 내가 75살이고 경수도 끊어졌으니 이제 자식 낳을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에게 시집와서 후사를 못 이어주니 내 죄책감이 너무나 큽니다. 그러므로 젊고 아름다운 내 여종 하갈이 있으니 하갈을 당신에게 첩으로 줄 테니까 하갈과 들어가서 자손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왔으니까 “무슨 소리!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기를 하늘에 별과 그 땅에 모래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했는데 무슨 당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안돼!” 그랬으면 좋았겠는데 아브라함이 또다시 사람인지라 사라의 말을 들으니 “내가 나이도 늙고 사라도 이제 경수가 끊어졌으니 자식을 못 나을 것 아니냐?” 그러니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라도 첩을 얻어서라도 애를 낳아야 되지 않겠냐?“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옆에 있는 하갈이 눈짓을 자꾸 합니다. 그러니 사라가 권면한데다가 하갈이 유혹을 하니까 아브라함이 그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창세기 16장 3절에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성령을 쫓아 행했으면 그 육신의 욕심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제켜 놓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제켜 놓고 또다시 인간의 욕심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아닙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영원한 비극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비극이 다가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는 하말티아라고 해서 빗나간다. 탈선하다는 말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인생의 삶을 탈선을 하게 되고 탈선이 깊어지면 사망에 이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탈선했습니다. 그는 탐욕의 죄가 들어오매 탈선을 해서 젊은 하갈에게로 들어가서 그 다음 결과로 사망이 다가왔습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5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는데 하갈이 곧장 젊은 여자니까 잉태했어요. 어린 아기가 뱃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목에 힘을 넣고 어깨를 쩍 벌리고 주인인 사래가 말을 해도 순종도 안하니 이 사래가 속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사래보는 앞에서 저녁이 되면 아브라함을 탁 끼고 낚아채가지고서 뒤를 돌아보고 픽 웃으면서 하갈의 방에 들어가고 하니 사래가 아예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그러나 마지못해 그랬는데 이럴수가 있느냐. 그래서 남편을 만나서 “날 죽여. 날 죽여.” “당신이 애를 못 만들었지. 내가 못만들었느냐?” “그래 보아라. 하갈이 애를 가지니까 나를 무시하고 내 말도 듣지 않고 집안일도 보지 않고 저렇게 삐죽대고 의기양양한 것 보아라!” 아브라함이 고통이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애가 없더라도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두 여자 사이에 끼었으니 얼마나 죽을 지경입니까? 한 여자 거느리기도 힘이 드는데 두 여자 사이에 끼었으니 고통이 말로 다할 수 없지요.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분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래가 하갈을 내어 쫓으니 하갈이 도망을 쳤다가 천사의 부름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나중에 하갈이 아들을 낳아 이스마엘을 품에 안았으니 그때부터 가정에 분란이 얼마나 심한지 아브라함에게는 평화가 다 사라지고 행복이 다 사라졌습니다. 가정에 풍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오늘날 온 세계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였는데 백세에 이삭을 낳고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은 할 수 없어서 사래의 강권에 못 이겨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들이 쫓겨나가면서 원한을 품고 나가면서 품은 그 원한이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대손손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중동에서 잃어버린 평화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12절에는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고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말했습니다. “네 자손이 나가면 들나귀 같이 뛰고 놀 것이며 모든 사람이 너희 자손을 치고 너희 자손도 모든 사람과 전쟁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동의 이스라엘과 아랍사이의 분쟁은 이전에도 끊이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너무나 격렬하게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이를 중동전쟁이라 부르는데 1948년에 1차 중동전쟁, 독립전쟁이 있었고 1959년 2차 중동전쟁, 시나이 전쟁이 있었고 1967년 3차 전쟁, 육일전쟁이 있었고 1973년 4차 중동전쟁, 욤키푸르전쟁이 있었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 아랍과 이스라엘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고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다 이겼습니다. 이밖에도 걸프전, 이라크전이 있었고 지금도 이 지역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릴 만큼 정세가 불안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는 아직도 테러와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2002년 사이에만 해도 양측의 충돌로 인해 희생된 사망자수가 팔레스타인 1,943명, 이스라엘은 637명 등 총 2,629명이 테러로 죽었습니다. 또한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어린이중 60%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한사람의 불순종이 이처럼 중동지역을 평화의 사각지대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6. 자아를 완전히 비운 아브라함
여섯째로, 마지막 아브라함은 자신을 완전히 비웠습니다.
100세에 낳은 이삭이 이제는 청소년이 되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먹고 자고 일하고 아버지의 수발을 해주니 아버지가 얼마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귀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말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로 2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지시기 내려졌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자식 외독자를 모리아 산에 데려가서 잡아서 각을 떠서 태워드리는 제사로 드려라. 인간으로써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정말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냐 안 받아 들이냐 최후로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 탐욕을 깨뜨리고 나를 비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1차 시험에 실패했고 또 제2차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제3차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웠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하나님 앞에 태워 드리는 제사로 드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가 아들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 장작을 쌓아 놓고 아들을 묶어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칼로서 그 목을 베려고 할 때 창세기 22장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제야 비로서 내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 알겠다. 왜, 너에게 가장 귀한 독자를 내놓았기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비웠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귀중하게 여긴 줄을 이제야 알겠다 했습니다.
[결론]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거창스러운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기를 원하시고 여러분을 건지시고 높이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속에 탐욕을 비워야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비워야 되고 억지로 비워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탐욕을 비우지 아니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압력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고통과 시련과 환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압박 때문에 내가 깨어지고 나중에 회개하고 손들고 주님 그 발 앞에 엎드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할 때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정욕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되 세상을 함께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다가 많은 시험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최후로 세상을 떠나보내고 난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축복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새해에는 우리가 하나님 그 발 앞에 엎드려 깨어지고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진실로 주의 뜻을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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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자기를 비워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
by 삶의언어 posted May 10, 2024 Views 6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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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 신앙성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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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드린 날 | 2005-01-09 |
오늘의 성구 | 야고보서 1장 12절로 15절 말씀 |
설교 영상으로 이동 | https://youtu.be/WCXuN0sipfw |
설교영상 관련 설명 |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