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해외로 파송된 선교사
한인사회 단결 위한 ‘신민회’ 조직
고통 받는 교포, 복음으로 위로해
1903년 1월 13일, 조선인 86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 구한말 쇠락해가는 조선에서 이주를 결정한 이민단이 하와이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에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해외 선교지에 파송된 선교사도 함께 있었다. 바로 홍승하 선교사이다.
1863년 8월 22일 경기도 남양군 영흥도에서 태어난 홍승하 선교사는 어릴 적 한학과 수학을 배우고 일본에서 무관학교를 다녔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국권수호운동에 참여하다 알게 된 미감리회 조지 존스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했다. 1901년 38세에 예수님을 영접한 홍승하 선교사는 다음해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지도자 양성소인 ‘신학회’를 졸업했다.
1902년 조지 존스 선교사는 전쟁과 가뭄으로 고통 받는 조선의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하와이 노동 이민을 추진했다. 존스 선교사는 이때 홍 선교사를 하와이 농업이주민촌 해외 선교사로 파송했다.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고, 홍승하 선교사와 안정수·우병길 등 교인들은 리버 호텔 스트릿 코너에 셋방을 얻어 미국 하와이 ‘한인감리교선교회’를 설립했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조선에서의 약속과 달리 하와이 생활은 혹독했다. 한인들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10시간씩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70센트도 안 되는 일당을 받았다. 이들에게 이민생활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전부였다. 홍 선교사는 교인들과 함께 사탕수수 농장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예배드리며 복음을 전파했다.
한인들의 환경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신앙을 갖게 된 그들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웠다. 예배를 통해 지친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으며 교회는 친교와 교육의 중심이 됐다. 한인들은 교회에서 민족의 결속과 단결을 다지며 민족 정체성을 강화했다.
홍 선교사는 교회 사역뿐 만 아니라 ‘신민회’를 조직해 한인 사회의 단결과 국권회복을 위해, 교포의 지위향상과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또한 ‘포화한인교보’라는 월간 한글 교회 소식지를 발간해 각 농장에 흩어져 농사를 짓는 한인 동포들에게 배포했다. 하지만 홍승하 선교사는 1905년 7월 건강상의 문제로 2년여 동안의 해외 선교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게 된다.
국내에 복귀한 홍 선교사는 13년 동안 강화, 인천, 경기도 남양군, 충청도 등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 전도 활동에도 힘썼다. 그는 지병으로 인해 1918년 55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