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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인물

손정도 목사

by 삶의언어 posted Jan 10, 2024 Views 5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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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위해 헌신하는 ‘걸레의 삶’ 선택한 성자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 독립운동 헌신
큰 아들 손원일 제독, 초대 해군참모총장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애국지사가 있다. 바로 손정도 목사이다. 1882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손정도 목사는 유교가문에서 성장했다. 그는 23세 무렵,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투숙한 곳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개종했다. 그는 개종 후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문 대대로 모셨던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쉈다. 이 일로 손정도는 고향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떠나야했다. 그는 평양에서 미감리회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의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활동하며 숭실중학에서 공부했다.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손정도 목사는 1909년 진남포교회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해 1911년 만주지방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하얼빈·선양·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다니며 선교 활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1912년 ‘가츠라암살음모사건’ 가담 혐의로 체포 돼 모진 고문을 받고 1년 유배형을 선고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전남 진도로 유배 돼 석방되기까지 순사, 형사를 비롯해 주민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며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이후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하며 ‘하나님 사랑이 곧 민족과 나라 사랑’임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이다. 1918년 손정도 목사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손정도 목사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삶을 ‘걸레의 삶’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틈틈이 자녀들에게 “비단옷은 없어도 큰 지장은 없지만 걸레는 잠시라도 없어지면 집안이 흐트러지고 더러워진다. 나는 걸레의 삶을 선택했다. 걸레의 생명은 자기를 죽이고 이웃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형직과 숭실 학교 동문이었던 손정도 목사는 부친을 잃은 김일성을 자식처럼 돌봐줬다. 김일성은 ‘비밀독서회사건’으로 체포돼 7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이때 손정도 목사가 옥바라지를 하면서 그를 석방시키는 일에 일조했다. 이 때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손정도 목사는 과로와 고문 후유증으로 만성 위궤양에 시달리다 1931년 향년 49세에 소천 받았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손정도 목사에 대해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 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라고 적혀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언에 따라 2003년 남한 신학자들과 ‘손정도 목사 남북학술토론회’를 열고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하기도 했다. 손 목사의 장남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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