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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by 삶의언어 posted Nov 25, 2024 Views 4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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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그리스도인
예배드린 날 2006-05-21
오늘의 성구 디모데후서 4장 6절로 8절 말씀
설교 영상으로 이동 https://youtu.be/uCE3byUHOZ0
설교영상 관련 설명 위 주소는 본 말씀 전용 유튜브 주소입니다. - 설교영상은 [조용기목사님의 평생설교] 전용 유튜브채널에서 공개중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장 6∼8절

 

좁은 문을 향한 주님의 은혜
선한 싸움으로 믿음을 지키고
예비된 의의 면류관 주어져

 사도 바울 선생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사형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죽기전에 한번 만나보기를 간청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해서 기록하게 됩니다. 바울 선생께서 살아온 평생을 되돌아보고 또 사후의 소망의 말씀을 기록한 그 편지 내용은 우리에게 큰 은혜와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1. 내가 선한 싸움을 이기고

 바울 선생께서는 첫째로,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일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인간의 삶 자체는 생존하기 위한 싸움의 연속입니다. 욥기 5장 7절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싸움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린 아이가 태어난지 8일동안은 생사의 기로에 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8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하나님과의 선민 계약인 할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8일전에 죽을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8일이 지나야 그가 한 인간으로써의 생존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생존경쟁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보건복지포럼’ 5월호에 2005년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결혼에 대한 긍정적 태도율’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인 남녀 중 51%가 결혼을 안 해도 괜찮다고 응답했습니다. 우리 세대에는 태어나면 반드시 결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은 결혼 안해도 괜찮다는 젊은이들이 51%나 됩니다.

 또한 기혼 여성 중 ‘자녀가 없어도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34.9%나 됩니다. 결혼과 자녀에 대해, 올해 초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05년 전국 가족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한국일보 3월 3일자) 결혼을 해도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양육 및 교육비 부담’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20대 청년들 중에는 58.3%가 ‘결혼을 해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또한 여성 가족부 조사에서는 우리나라의 모든 연령대에서 부부 갈등의 가장 큰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57%)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입니다. 더구나 경제적인 전선에서 싸움은 더욱 치열한 것입니다. 교육과 직업, 의식주, 행복, 부요와 평안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생존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 이 생존경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이같은 생존경쟁과 마찬가지로 천재지변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린란드 빙하의 빠른 해빙으로 인한 해수면 상승,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 등이 자연의 순환주기와 질서를 파괴하여 지구 전역에서 천재지변을 가속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지구의 기후변화등으로 인한 천재지변과 각종 질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인간의 힘에만 의지해서 싸우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생존경쟁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91편 2절로 3절에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시편 91편 10절에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장 33절에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적으로 인간의 지혜와 총명, 수단과 방법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적인 가치관이 붕괴되었고 사회의 혼돈과 자연의 파괴가 오늘날 인류의 종말을 가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선한 싸움을 계속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을 위해서,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전지구적인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는 싸움을 계속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영적인 전쟁을 끊임없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속과 탐욕, 근심, 걱정, 시험, 환난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시시각각으로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로 12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나태해지면 결국에는 사탄의 덫에 걸리게 되고 세속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항상 기도하기를 힘쓰고 말씀을 읽고 두세사람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림으로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복음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세계 도처에 있으므로 끊임없이 충돌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되돌아본 바울선생은 고린도후서 11장 23절로 27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함으로 바울 자신의 일생이 투쟁의 연속이었음을 나타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그의 삶을 회고하며 ‘모든 선한 싸움을 통해서 일생을 걸어왔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고는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싸움을 인간의 힘으로 싸우면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선한 목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4절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 앞이 캄캄하고 눈앞이 아득하여 어떻게 살아갈지 모를지라도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지팡이로 길을 열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을 살 때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야 하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끊임없이 순간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치앞도 모르지 않습니까? 주님의 지팡이가 우리에게 길을 만들어 내시고 주의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우리의 싸움에서 승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싸움 없이 평안히 인생을 살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악하고 쓸모없는 싸움을 싸워서는 안되겠지만 선한 싸움, 곧 생존을 위한 투쟁은 끊임없이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2.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인간은 인생의 두 갈래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여 가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로 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길은 넓은 길이지만 절제되지 않은 길이요 방종의 길이므로 이 길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가시밭 험한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멸과 좌절과 절망이 세상길의 종착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길은 인본주의의 길이요, 거짓된 길이요, 죽음의 길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야훼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길을 가는 것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순종해서 살면 환경가운데 여러 가지 절망과 좌절을 당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 길이 신본주의의 길이자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좁은 길은 걸어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나중에는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이 있고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하루가 되기전에 일생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세상은 이를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이것을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예정된 삶을 살고 또 그 안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될 삶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하지 말것을 명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벌의 종류는 다윗에게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24장 13절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쫒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의 결정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24장 14절로 15절에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야훼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야훼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야훼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다윗은 또 다른 결정을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3일간 전염병이 창궐되는 것을 결정하자 7만명의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이미 선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별한 일생 중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 외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길이 있고 기뻐하시는 길이 있고 온전한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예정이 있고 우리의 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한 것은 아무리 기도해도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에서 시작하여 문화와 사회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 등은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변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정된 인생 중에서 우리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일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학업이나 배우자, 그리고 직업과 친구 등을 선택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갈 동안에 인종이나 지리나 시대나 문화, 부모 등은 선택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예정 속에서도 우리 각자가 선택해야 될 많은 부분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된 삶을 받아들이고 또한 최선의 선택을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백의의 천사로 널리 알려진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이다. 주님, 저도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은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간호사로서의 헌신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후에 한 기자가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녀는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끝까지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즉, 온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예정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여 종착지인 로마의 감옥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는 중도에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로마까지 안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알고 온전히 순종할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로 10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선택해서 끝까지 달려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삶의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삶의 종착역까지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두셨는데 이 예정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지만 이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 길로 향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셔도 우리가 끝까지 그 선택을 받아들이고 간직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사는 것은 우리 각자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바울 선생이 말한 것처럼 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변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 바울 선생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지키고자 했던 믿음을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물심양면으로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서 전도를 하여도 예수를 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믿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믿음의 선물인 것입니다. 유다서 1장 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는 것으로 이 믿음으로 인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위글스워스 목사는 그의 사역 가운데 열네 번이나 죽은 자를 살렸던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20세기 전 세계에서 성령의 은사를 통한 복음전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위글스워스 목사는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때마다 항상 ‘과연 하나님이 역사하실까?’라는 마음에 갈등을 느껴왔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젊은 친구가 위글스워스 목사에게 “어떻게 그렇게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위글스워스는 마가복음 4장 28절의 말씀인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믿음이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감으로써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생기고 다음에는 열매에 곡식을 맺는 것처럼 성장함으로 온전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보물입니다. 그러나 씨앗이 하루아침에 큰 나무가 될 수 없듯 믿음도 하루아침에 온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힘써 싸우는 동안 우리의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믿음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릴 때 어떤 씨는 길거리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고 다른 씨는 흙이 얇은 바위에 떨어지매 싹이 나다 말라 죽었고 다른 씨는 가시넝쿨에 떨어져서 말라 죽어 버렸고 또 다른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매 30, 60, 100배로 결실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9절에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거리는 수많은 사람이 짓밟고 지나가는 관심을 갖지 않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도 믿음의 성장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마귀는 언제든지 그 믿음을 빼앗아 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돌밭에 있는 믿음은 마태복음 13장 20절로 21절에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믿음은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믿음으로 자라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시밭 믿음은 탐욕에 짓밟힌 믿음을 말합니다. 마음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가시밭처럼 우거졌기 때문에 탐심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옥토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옥토에서 순수하고 헌신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면 믿음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은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뿌려지는 말씀을 듣고 사랑하고 묵상하고 마음에 받아 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고 또한 생활속에서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우리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성장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더 큰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는 복된 삶을 살 때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 우리에게 주어짐을 알고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의지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되 낙오자가 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고 낙심하고 뒤로 넘어지는 자 없게 도와주심으로 주님이 주신 믿음을 잘 지켜 나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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