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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인물

최찬영 선교사

by 삶의언어 posted Jan 06, 2024 Views 3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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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대한민국서 첫 파송한 선교사
은퇴 후 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써  

최찬영 선교사는 1926년 평양에서 태어나 만주 땅 연길에서 성장했다. 1945년 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이 되자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최 선교사는 친구와 어머니의 권유로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1948년 남산에 위치한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최찬영 선교사는 1950년 6·25전쟁이 나고 사선을 넘나드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공산군에 잡혀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9·28 수복 후 육군 군목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타고 가던 트럭이 3m가 넘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휴전되고 1954년 최 선교사는 의사였던 김광명 사모와 결혼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당시 풀러신학교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돼 기쁜 마음을 안고 있었던 최 선교사는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선교사 제안을 받았다. 그는 아내와 밤새 논의한 끝에 "선교의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유학 대신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됐다.

최찬영 선교사 부부는 1955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첫 해외 선교사로 파송 예배를 드렸고 이듬해 6월 태국기독교단(CCT)의 선교 동역자로 파송됐다.

최찬영 선교사는 1956년 태국 방콕에서 사역했고 방콕 제2태국인교회 담임, 방콕 기독교 병원 원목으로 활동했다.

최찬영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그때 미국 성서공회로부터 태국성서공회의 총무를 맡아 줄 것을 제안 받았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1962년 6월 아시아인 최초로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했다.

또한 1978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 총무로 취임해 12년간 성서보급에 앞장섰다. 그는 총무 부임 당시 1100만 권이던 성서반포수를 3억 권으로 확장시켰고 1987년에는 중국 본토 남경에 최신식 인쇄공장 '애덕성경인쇄소'를 건립했다. 애덕성경인쇄소는 세계 최대의 성경 인쇄소로 90개 이상의 언어로 매년 10만 권 이상의 성경을 발행하고 있다.

최 선교사는 1992년 2월 66세로 은퇴한 후에도 풀러선교대학원에서 교수로, LA 또감사교회 선교목사 등으로 활동했다. 84세 되던 2010년에는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을 위해 힘썼다.

'선교에는 은퇴가 없다'는 본을 보인 최찬영 선교사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LA 킹슬리메노의 프론트 포치 은퇴자 마을에서 사람들을 선교사로 헌신하도록 하는 '황금기 선교사 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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