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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인물

도산 안창호

by 삶의언어 posted Feb 13, 2024 Views 4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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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선교사가 세운 구세학당서 기독교인 돼
근대화의 선각자·실천적 민족 운동가 삶 살아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대한민국을 사랑했고, 조국을 위해 한평생 목숨을 바친 안창호 선생의 말이다.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호는 도산(島山). 한학을 배우다가 신식학문에 눈을 뜬 안창호 선생은 1895년 상경, 구세학당(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장로교 계통 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됐다.

 안창호 선생은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 설치를 위해 노력했으며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 계몽을 위해 앞장섰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었다.

 먼 타국에서 을사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호 선생은 1906년 귀국해 1907년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독립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안중근에 의해 전개된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1909년)과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고 1910년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3개월 간 개성헌병대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안창호 선생은 이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1912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직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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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면서 안창호 선생은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고 3·1운동 직후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한다. 그리고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하지만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했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본국으로 송환됐다. 2년 6개월 복역하던 중 가출옥으로 휴양하지만 동우회 사건으로 재투옥되고 말았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은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하다가 끝내 생을 마감하고 만다. 안창호 선생은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위해 한평생 헌신의 삶을 살았다. 안창호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또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으며 2012년 1월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터 킹센터 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됐다.

 도산이 우리 민족 근대화의 선각자이며 정신적, 실천적 민족 운동가로 활동한 이면에는 부인 이혜련 여사의 내조가 큰 힘이 됐다. 1883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 여사는 도산의 뜻에 따라 기독교인이 됐고 현대교육을 받은 후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흥사단 단원이기도 했던 이혜련 여사는 1919년 3월 애국부인회를 결성해서 회장으로 재직하며 남편이 미국을 떠나 중국 한국 등지에서 독립 활동을 할 때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아 지원하는 등 독립 운동에 큰 힘이 됐다. 그녀가 결성한 애국부인회는 미국에서의 여성 독립운동의 모체가 됐으며 이러한 헌신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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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4월 이혜련 여사가 소천한 후 망우리에 있던 안창호 선생의 묘가 1973년 서울 청담동 도산공원으로 옮겨지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도 바라던 독립된 조국의 땅에 함께 잠들게 됐다. 자녀로는 동양계 최초 미국 배우였던 큰 아들 필립과 최초 미 해군 여성 사격수 교관, 최초의 동양계 여성해군 장교, 동양계 최초 미국 국가 안전보장국 담당관 등을 지낸 장녀 수산 등 다섯 자녀를 두었다. 가족보다도 조국을 사랑했던 안창호 선생의 삶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로 사랑하면 살 것이요, 서로 싸우면 죽을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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