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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해커, 비운의 천재 알란 튜링

by 삶의언어 posted Dec 27, 2022 Views 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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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hacker)라는 단어의 어원인 해크(hack)는 1950년대부터 해커의 본산지 매사추세스 공대(MIT)에서 통용되던 은어이다. 또한 1960년대와 70년대 초 MIT를 비롯한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이들을 1세대 해커로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1954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알란 튜링(Alan Turing)을 세계 최초의 해커로 꼽고 있다. 영국의 천재 수학자로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는 그가 세계 최초의 해커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학자와 과학자인 알란 튜링은 마치 영화와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1912년 인도 식민지의 영국 공무원이었던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부모와 떨어져 영국에서 교육받으면서 '사회성이 부족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천재적인 성향은 대학에 와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35년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에서 수리논리학을 공부하며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할 문제'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고정되고 명백한 과정으로 풀 수 없는 수학 문제들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훗날 컴퓨터 이론의 발전에 이정표가 되었고, 오늘날 튜링 머신으로 알려진 개념의 기초가 되었다. 1936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건너 간 27세의 튜링은 오늘날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 머신을 수학적으로 고안해냈다. 튜링 머신은 명령어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데 튜링은 구멍 뚫린 종이테이프에 필요한 명령을 입력하면 마치 자동기계처럼 컴퓨터가 작동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튜링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고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 미국 학계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운이 감도는 자신의 조국, 영국으로 돌아갔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개전 직후 영국의 유명 과학자들이 그들의 학교, 연구실, 거리에서 일제히 사라졌다. 그들이 모인 곳은 런던 근교의 블레츨리 파크. 오늘날까지 이곳에서 이들이 과연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일급 비밀이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들 중 일부가 독일의 암호제조장치인 에니그마 암호 해독에 임했고, 결국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블레츨리 파크에는 세계 유명 암호 해독가들이 모여있었다. 알란 튜링, 그도 그곳에 있었다.

1943년 12월 튜링은 코로서스(Colossus)라는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 2천 4백 개의 진공관을 이용해 만들어진 이 컴퓨터는 높이만 3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공학 판독기에서 해석된 메시지는 5비트(bit) 텔레프린트 코드로 테이프에 천공되었는데, 1초에 약 5,000자를 천공할 수 있었다. 콜로서스는 이렇게 초당 5천자의 암호문이 종이 테이프를 타고 들어가면서 에니그마의 암호와 일치할 때까지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이 콜로서스의 탄생으로 결국 독일의 완벽하리만치 빈틈없었던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를 깨뜨릴 수 있었다. 연합국은 이 콜로서스를 이용해 독일의 거의 모든 비밀 통신을 도청할 수 있었고, 결국 독일을 패망으로 이끌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연합군의 상륙 지역이 '칼레'라고 예상했던 독일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함으로써 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실 알란 튜링이 만들어낸 '콜로서스'는 우리가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라고 알고 있는 '애니악'보다 2년이나 앞서 탄생된 것이다. 최근 극비리에 은폐되어 있던 영국의 콜로서스가 세상에 공개됨에 따라 미국 애니악의 오만한 자부심이 좌초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은 맨체스터 대학으로 옮겨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억용량을 가진 맨체스터 대학 자동 디지털 기계(MADAM)의 부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그가 보인 컴퓨터 설계와 프로그램 분야에 있어서의 성과는 컴퓨터 기술에 대한 혁명적 성과였다. 1950년 그는 '계산하는 기계와 지능'이라는 논문을 발포한 바, 지금껏 인공지능을 탐구한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위기에 처하게 된다. 동성애자였던 그가 1952년 '음란행위 일반에 대한 위반'으로 기소된 것이다. 영국 법원은 동성애 죄목으로 잡혀온 튜링에게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는 사실조차 애써 망각한 채, 10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을 것인지 결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튜링은 에스트로겐을 선택했고, 이로 인해 발기불능, 유방 발달, 중추 신경 계통 손상이라는 치명적인 신체의 변화를 겪게 된다.

튜링은 죽기 직전 1954년 3월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로빈 그랜디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메시지'라고 적힌 암호 엽서 몇 장을 보냈다.
"배척의 원리는 자유롭게 사귀도록 내버려둔다면 타락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는 타락하지 않았고 정당하다는 항변의 뜻이었다.

그리고 몇달 후인 1954년 6월 8일, 알란 튜링은 42년의 짧고 굴곡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손에는 청산가리가 묻어 있는 붉은 사과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짧은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회는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나는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먹고 자살함으로써, 알란 튜링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사형 선고에 버금갈 만큼 끔찍한 선고를 내린 사회를 향해 처열한 야유를 보내고 간 것이다.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Science Goes To War)의 저자인 Ernest Volkman은 애플사의 매킨토시 애플 컴퓨터의 로고가 바로 알란 튜링이 먹고 자살한 독사과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은 증명되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세계 최초의 컴퓨터 설계자이며, 인공지능의 아버지인 알란 튜링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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