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巧)는 졸(拙)의 노예다.
[원문] 巧者는 拙之奴니라.
[번역] 교자는 졸지노니라.
[해설]
기예(技藝), 기교(技巧)에서는 보는 바와 같이 교(巧)는 잘하는 일이요, 교묘한 일이다. 이에 대해 졸렬(拙劣)·졸작(拙作)이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졸을 서투른 일이요, 못난 일이다. 그러므로 글씨를 쓴대로 '졸'보다는 '교'가 나을 것이요. 집을 지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교'는 인위적인 까닭에 그것이 지나치면 자연스러움이 상실되어 도리어 천해지는 일면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기교의 극치는 무기교라는 말도 생기게 되는 것이니, 인위적인 것을 다 떨쳐 버릴 때 기교는 그 앞에서 빛을 잃는다. 만고의 명필로 평가받는 추사(秋史)의 비밀이 바로 이런 곳에 있다.
청(淸)의 학자 유곡원(兪曲圓)의 글에 눈섭 이야기가 나온다. '안면 문답(顔面問答)'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 얼굴에 있는 눈과 코와 입이 눈썹을 상대로 벌인 문답이다. 얼굴에는 맨 위에 눈써빙 있고, 그 밑에 눈과 코와 입이 차례로 위치하고 있다. 눈이나 코나 입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만이 나올 만하다. 눈은 사물을 보고, 코는 호흡을 하고 냄새를 맡는 기능을 갖고 있다. 또 입은 음식을 먹고 말까지 한다. 그런 중요한 재주(巧)를 지닌 그들이 밑에 있고,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는 눈썹이 위에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이냐고, 그들이 따지고 들었다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이에 대해 눈썹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그렇다. 당신들에게는 각기 중요한 임무가 있고 또 그것을 당신들은 훌륭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렇다 할 일이 없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여기에 있을 뿐이다. 왜 내가 당신들 위에 있게 되었는지, 나 자신 이유를 알 수가 없으나, 이렇게 있게 되어 있으므로 있을 뿐이다.
눈·코·입은 '교'요 눈썹은 '졸'이다. 전자를 인위(人爲)의 비유로 보면 후자는 무위(無爲)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교'요 인위적인 것이 '졸'이요 무위인 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인위적인 '교'로 치달릴수록 자연에 대한 반역 때문에 파탄에 직면해야 하고, 인위적인 '교'를 다시 무위의 '졸'로 지양시키는 경우에는 도리어 인위적인 '교'를 완성하는 것이 된다. '교'가 '졸'에 지배받아야 하는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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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는 마음 - 성심편(省心篇) 6
by 삶의언어 posted Dec 27, 2022 Views 0 Likes 0 Replie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