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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바로잡는 길 - 정기편(正己篇) 17

by 삶의언어 posted Dec 27, 2022 Views 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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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행록>>에서 말했다.
"삶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욕심을 적게 하고, 몸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이름을 피하는 법이니, 욕심 없기는 쉬워도 이름 없기는 어렵다.

[원문] 景行錄, 保生者寡欲하고 保身者避名이니, 無欲하나 無名이니라.
[번역] 경행록에 왈, 보생자는 과욕하고 보신자는 피명이니, 무욕은 이하나 무명은 난이니라.

[해설] 삶의 보존[保生]과 몸의 보존[保身]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로 떠오르는데, 삶의 보존이란 살아가는 면, 곧 생활의 보존이요, 몸의 보존이란 생명을 안전하게 지탱해 가는 일이 아닌가 싶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욕망이 필요하고, 그러기에 식욕 따위 욕망을 누구건 본능으로 부여 받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으로 해서 욕망이 욕망을 낳는 식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다 보면 도리어 욕망 때문에 생활 자체가 파탄을 맞는 수가 많다. 또 이름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그것으로 불리우는 까닭에 이름이 곧 나라는 등식(等式)이 성립한다. 그리하여 부모와 이웃들 사이에 이것이 통용되기 마련이나, 그 사람의 존재가 두드려질수록 알려지는 범위가 넓어져, 한 지역에 알려지는 이름이 있고, 한 나라 안에 알려지는 이름이 있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영원성을 얻는 이름도 있다. 그만큼 명예욕이라는 것도 대단할 수밖에 없어서, 물욕에 초연한 사람중에서도 이것에 사로잡혀 있는 예가 허다하니, 그만큼 그 희생자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욕망과 명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유교와 도교는 큰 차이를 보여 준다. 유교는 현실적 윤리이므로 욕망을 의(義)와 예(禮)로 조절할 것을 요구할 뿐이며, 명성 내지 명예에 있어서는 보다 적극적이다. 물론 부당한 방법으로 명성을 낚으려는 태도는 배격되지만, '마흔 살·쉰 살이 되고도 명성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공자가 말한 것처럼, 자질이 있고 노력이 있다면 명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짙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것도 같은 발상의 말이 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교에서는 욕망을 적게 하며 이름을 피하라 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욕, 무명에 이를 것을 이상으로 표방했다. 이는 인위적인 것을 모두 제거해 자연무위(自然無爲) 속에 살아갈 것을 가르친 것인데, 온갖 욕망과 명성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를 해칠 자도 있을 수 없으므로 더없는 보신책이 될 것이나, 보신책이 점에 공리주의적 성격이 남는다. 이것이 중국적인 특생이요, 종교로 뛰어오르지 못한 윤리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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